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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의 역사를 바꾼 빈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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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 머니) 전쟁이 끝난 후에는 항상 좋은 와인이 나온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인 1953년도 예외는 아니다. 1953년은 복합적인 향과 기교 있고 매력적인 보르도 레드 와인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빈티지다. 열매가 익어가는 내내 좋은 기후는 아니었다. 여름이 대체적으로 뜨겁고 건조하기는 했지만 가끔 강한 비바람으로 성장이 정체되기도 했다. 하지만 수확기 동안 날씨가 좋아 전형적인 보르도 레드 와인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1959년은 영국 와인상들이 ‘20세기의 가장 훌륭한 빈티지’라고 칭한 해다. 보르도 와인상들도 위대한 와인으로 불렀다. 혹자는 산도가 좀 부족한 것 아니냐는 의견을 개진했지만 이에 대해 와인 전문가인 페이노 교수는 와인의 모든 것 즉, 알코올, 추출물, 과육, 타닌이 모두 균질적으로 훌륭하다면 산도는 조금 부족해도 상관없다고 했다.

1961년은 1945년과 자주 비교되는 위대한 빈티지다. 1961년은 1945년과 비슷한 점이 많았다. 하늘이 알아서 가지치기를 해주었다는 점이다. 1945년에 서리가 심해 꽃봉오리들이 얼어버렸고, 비바람이 심해 꽃가루가 다 날아가 버렸다. 7월에는 지겹게 비가 내렸고, 8월에는 가뭄이 이어졌지만 9월에는 아주 햇볕이 좋았다.

이런 이유로 수확은 적었지만 껍질이 두껍고, 양분이 풍부한 포도 열매를 얻어 색깔이 아주 진하고, 잘 숙성되고, 농축되고, 타닌이 풍부한 와인을 생산할 수 있었다. 1961년의 훌륭한 와인들은 1945년의 와인을 능가하는 것들도 있다. 약간의 위험요소는 타닌이 두드러져 신선한 과일의 질감을 가려버릴 수 있다는 점 정도다.

1982년은 와인 역사에 이정표가 된 해다. 이 해의 와인 생산으로 와인 시장은 완전하게 회복될 수 있었다. 풍부한 수확량과 좋은 품질이 경제적인 상황과 잘 맞아떨어졌다. 기후도 위대한 빈티지를 만들어내는 데 처음부터 일조해 포도가 성숙하는 데 이상적이었다. 일찍 개화했고 균일했다. 뜨겁고 건조한 여름, 9월 14일부터 먼저 익은 메를로를 수확했는데 이때도 매우 더웠다. 수확기에 이틀 동안 심한 비가 내렸는데 다행히도 그 이후 일기가 좋아 카베르네 소비뇽도 평균적인 품질을 얻을 수 있었다. 타닌은 아주 풍부했다.

1985년은 기록적인 한파가 몰아닥친 겨울을 지나면서 포도나무들이 휴면상태를 지속했다. 하지만 어떤 지역에서는 심한 한파를 입기도 했다. 일찍 개화하고 잘 수분이 돼 포도송이가 오래도록 지속될 수 있었다. 이어지는 여름은 길고도 뜨거웠다. 수확도 아주 이상적인 기후에서 마칠 수 있었다.

1989년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위대한 빈티지다. 1980년대를 훌륭하게 마무리하는 빈티지이기도 하다. 1988, 1989, 1990 세 해는 어마어마하게 좋은 삼총사 빈티지다. 1899년과 1900년 쌍둥이 빈티지에 비견될 만한 좋은 빈티지들이다. 우선 기후가 아주 좋았다. 5월에 벌써 예년보다 3주나 성숙이 빨랐다. 일찍 개화해 완벽한 조건이었다. 포도송이가 잘 성숙된 것에 비해 타닌은 부족했다. 늦게 수확한 포도는 타닌이 보충됐지만 지나친 산도가 문제였다.

이어진 1990년도 아주 훌륭한 빈티지다. 기후는 1989년과 달랐다. 첫 번째 성장 조건에 있어 1월부터 3월까지 이상기후로 날씨가 너무 덥고 햇살이 강했다. 2월 24일에 영상 25도까지 올라가기도 했다. 고맙게도 4월에 비가 내렸고, 5월에는 해가 좋았다. 개화는 불규칙했다. 메를로는 만족스러웠지만 카베르네 소비뇽은 그렇지 못했다.

7월에는 지나치게 더웠다. 21일에는 영상 39도까지 올라가기도 했다. 이런 이상 고온은 역전 현상을 발생시켜 수액이 상승하는 것을 막아 성장에 장애를 초래했다. 하지만 9월에 고마운 비가 내려 대지를 식혀주었고, 9월 중순에는 수확이 가능하게 해주었다. 메를로는 아주 훌륭했고, 늦게 수확한 카베르네 소비뇽도 작고 두꺼워서 농축된 주스를 얻을 수 있었다.

이상에서 살펴보면 위대한 빈티지의 조건은 하늘이 알아서 해주는 가지치기로부터 시작됐음을 알 수 있다. 1945년도가 그랬고, 1961년도가 그랬다. 수확량은 줄어들었지만 몇 송이 남지 않은 포도송이에 포도나무는 모든 영양분을 집중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포도 열매를 익게 만들었다. 요즈음 포도나무 한 그루에 포도송이를 4~5개만 남기도록 가지치기를 하는 것은 위대한 빈티지가 생산된 조건을 인위적으로 따라하기 위함이다.

그 이후의 조건은 자연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포도 열매가 맺히고 성장하는 동안 뜨겁고 건조한 여름이 이어지면 이상적인데, 그렇지 않더라도 수확기에 날씨가 좋다면 이를 만회해 좋은 와인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2000년, 2005년 빈티지가 별 다섯 개에 해당하며, 2003년과 2009년도 훌륭한 빈티지로 손꼽힌다.

Outstanding ★★★★★
1953, 1959, 1961, 1982, 1985, 1989, 1990

Very Good ★★★★
1952, 1955, 1962, 1964, 1966, 1970, 1971, 1975, 1986, 1988, 1995,1996, 1999

(끝) / 필자 김재현 하나은행 WM센터 이사. 출처 한경 머니 제79호. 전체 기사 바로 가기 https://buff.ly/2EpT5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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