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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술'에 승부를 건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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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나 캠퍼스 잡앤조이 기자) 곰세마리 양조장의 주인장 유용곤(32) 씨와 양유미(31) 씨는 10년 지기 친구다. 미대에 가겠다는 꿈을 안고 입시 미술학원에서 만나 인연을 맺었는데, 어쩌다보니 지금은 사이좋게 서울 신림동 지하실에서 술을 빚고 있다. 맥주도 소주도 아닌 ‘꿀술’을.

영어로는 미드(Mead)라 불리는 꿀술은 ‘인류 최초의 술’로 알려져 있다. ‘베오울프’, ‘반지의 제왕’, ‘왕좌의 게임’, ‘엘더스크롤’ 등 고대 배경의 문학, 게임, 영화 등에도 자주 등장한다. ‘허니문’이라는 말도 결혼식 이후 보름간 벌꿀술을 마신 것에서 유래됐다는 이야기도 있다. 꿀로 만든 술은 달콤할지 씁쓸할지, 그 맛이 궁금해지는 것은 ‘주당’에게는 당연한 일. 유용곤 씨와 양유미 씨가 곰세마리 양조장에서 꿀술을 빚게 된 것도 그 작은 호기심 때문이었다.

“중세를 배경으로 한 게임이나 독일 문학작품을 읽다보면 ‘꿀술’이 자주 등장하더라고요.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술이라 그 맛이 궁금했죠. 생각만 하다 어느 날 문득 ‘직접 만들어 먹어보자’라는 결심을 하게 됐어요. 그렇게 무턱대고 친구 3명과 자취방에 모여 앉아 술을 빚기 시작했죠. ‘곰세마리 양조장’이라는 이름의 ‘곰세마리’는 그때 술을 만든 원년 멤버 3명을 의미하는 거예요.”(유용곤)

유용곤 씨를 비롯해 서울대 미대에 재학 중이던 곰세마리는 학교 앞 반지하 자취방에 모여 설레는 마음으로 생전 마셔본 적 없는 꿀술 만들기에 도전했다. 인터넷을 통해 술 빚는 법을 검색하고는 꿀과 물을 섞어 머스크를 만들고 효모를 넣어 발효 과정을 거쳤다. 이제 관악산의 정기를 받고 반지하 응달에서 꿀술이 달달하게 익어가길 기다리기만 하면 끝. 오매불망 꿀술을 맛볼 날만 기다리던 곰세마리는 열흘 정도가 지나 술병을 열었다. 생애 첫 꿀술 한 잔의 맛은 어땠을까.

"생각만큼 달콤하지 않았어요. 이 맛도 저 맛도 아닌, 그저 ‘나는 알코올이다’를 말하고 있을 뿐이었죠. 꿀술을 맛본 적도 없으니 ‘이게 꿀술의 맛인가’하며 고개를 갸웃거렸어요. 그 이후에도 술 빚기는 계속됐죠. 술 맛이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만드는 과정이 재미있었거든요. 효모가 발효되면 꼬륵꼬륵 거리는 소리가 나는데, 혼자 지내는 자취방에 생명체가 자라는 것 같아 신기하더라고요. 발효 냄새도 고양이 발냄새 같은 것이 나쁘지 않았어요.”(유용곤)

술 빚는 것이 즐거워 이 맛도 저 맛도 아닌 꿀술을 만들고 마시고를 반복하던 곰세마리에게 기적이 일어난 것은 10여 번째 꿀술을 만들었던 때다. 점점 술 빚기에 욕심이 나 발효를 공부하며 온도와 습도 등 환경을 조절하며 시험 중이었는데, 어느 순간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맛과 향의 꿀술이 완성된 것. 청포도향이 나면서 달콤하고, 술 한 모금을 넘기면 자연의 향이 온 몸을 휘감았다. 곰세마리는 이것을 ‘전설의 미드’라 부르며 환호했고, 자취방에 놀러와 꿀술을 맛보던 친구 양유미 씨도 그 맛에 완전히 빠져버렸다.

“이전에 자취방에 놀러와 먹어본 꿀술의 맛은 납작했다고 할까요? 알코올이 남아있는 음료 같은 느낌이었죠. ‘이걸 먹으면 내일 아프지는 않을까’하는 두려움 속에 마신 적도 많아요. 하지만 ‘전설의 미드’는 꿀 향기가 풍부하고 맛의 밸런스도 굉장히 좋았어요. 은하수를 마신다는 기분이 들었을 정도예요.”(양유미)

곰세마리와 양유미 씨는 이 멋진 꿀술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야겠다는 생각으로 들떴다. 이제는 자취방 말고 제대로 된 양조장이 필요했다. 비용은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마련하기로 했다. 700만 원을 목표액으로 잡고 펀딩한 사람들에게는 8개월 후 꿀술을 보내주기로 약속했다. ‘먹어본 적 없는 꿀술을 맛보겠다며 돈을 낼 사람이 있을까’하는 걱정이 앞섰으나, 결과는 대성공. 목표액 700만원을 훌쩍 뛰어넘는 2000만 원의 펀딩액을 마련했다.

펀딩액으로는 신림동에 28평 규모의 지하실을 임대해 보증금과 월세를 내고, 바닥 공사를 진행했다. 중소기업청 스타트업 지원 프로그램에 참여해 받은 창업 후원금 3천만 원으로는 재료를 구입하고 양조 설비를 갖췄다. 좋은 술을 빚기 위한 공부에도 전념했다. 도서관에서 발효, 술 관련 책은 모조리 읽고 해외의 꿀술도 공수해 맛을 보며 연구했다. 곁에서 훈수를 두며 조력자 역할을 하던 양유미 씨도 친구 따라 곰세마리 양조장의 멤버로 두 팔 걷어붙이고 나섰다.

“본격적으로 술 빚기를 시작했지만 시행착오가 많았어요. 1인분의 파스타를 만드는 것과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잖아요. 친구 몇 명이 모여 앉아 만들 꿀술을 빚다가 1000병의 술을 한 번에 만들려니 쉽지 않더라고요.”(양유미)

특히 난항을 겪은 것은 보존제 사용의 문제였다. 보통 와인을 만들 때는 효모에 의한 알코올 발효 방지를 위해 아황산염이라는 인체에 무해한 보존제를 사용한다. 보존제를 넣지 않으면 계속해서 발효가 일어나 일정한 맛을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자취방에서 만들 때야 보존제를 넣을 필요가 없었지만 판매를 위해서는 보존제 사용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꿀술은 포도를 사용한 와인처럼 짙은 향을 가진 것이 아니다보니 미량의 보존제 사용으로도 향의 변화가 크게 느껴졌다.

“술은 일정 기간의 숙성을 거친 후에 맛을 볼 수 있잖아요. 몇 달을 공들여 만든 후 맛을 보면 기대한 맛이 아닌 거죠. 그동안 들인 시간과 노력이 허탈해지더라고요. 한번 술을 빚을 때 550리터의 발효 탱크에 꿀을 200kg 정도 넣어 만들거든요. 맛이 나지 않는 술은 그대로 버렸어요. 한 번에 500만 원을 하수구로 흘려보낸 거죠. 그렇게 몇 번을 만들고, 버리고 하는 동안 1년이 흘렀더라고요.”(양유미)

계속된 시행착오 끝에 이들은 적정한 숙성 기간인 ‘6개월’을 찾아내고, 가장 알맞은 온도와 환경을 맞췄다. 술맛을 좌우하던 보존제는 과감히 빼버리기로 했다. 주재료인 꿀은 서울 양봉장에서 공수해 사용한다. 서울에서 빚는 술이니, 서울에서 나는 꿀로 만들어보자는 마음에서다.

고생 끝에 만든 술을 펀딩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나니 이제 ‘판매’라는 벽에 부딪쳤다. F&B업계가 뭔지, 유통이 뭔지 아무것도 모르던 대학생들은 눈앞이 깜깜했다. 술을 빚는 것과 파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었기 때문이다.

“고민을 하고 있던 때 우연히 좋은 기회를 잡게 됐어요. 일러스트레이터로 일을 받아 하고 있었는데 호주에서 온 조셉 리저우드 셰프의 팝업 레스토랑 메뉴판 디자인을 맡게 된 거죠. 로컬 푸드에 관심이 많은 셰프라 한국의 재료로 음식을 만들어 판매할거란 얘기를 듣고는 ‘서울에서 만든 꿀로 술을 빚는 친구가 있다’며 소개시켜줬죠. 그렇게 팝업 레스토랑에 참여하게 됐고, 그 자리에 왔던 이찬오, 강민구 등 유명 셰프들에게 선보이게 되며 레스토랑 납품의 기회를 얻게 됐어요. 함께하던 원년 멤버들도 개인 사정으로 빠지게 돼 면허도 없는 저희 둘이 택시를 타고 다니며 업장에 술을 배달하고, 술병의 라벨지까지 직접 붙이고 있죠.”(양유미)

현재 곰세마리 양조장의 꿀술은 ‘샤누’, ‘밍글스’, ‘21세기 서울’, ‘안씨 막걸리’, ‘올리앤로렌스’ 등에서 맛볼 수 있다. 오리지널과 스위트, 2개월간 짧게 숙성한 어린꿀술 등 3가지 종류를 판매한다. 내년 초를 공식 런칭으로 생각하고 술을 많이 만들지 않은 터라 재고가 부족해 현재 개인 판매는 어렵다. 개인적으로 구입하려면 어린꿀술은 10월 이후, 오리지널은 내년 1월에나 받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벌써부터 예약 주문이 밀려있을 정도다.

예상치 못한 주문 폭주는 신세계 정용진 부회장 덕(?)이 컸다. 얼마 전 정용진 부회장이 레스토랑에서 곰세마리 양조장의 꿀술을 맛보고는 ‘#내스타일 #전통주발견’ 이라며 SNS에 소개했기 때문이다.

“정말 감사하죠. 하지만 재고가 없어 판매할 수 없다는 게 너무 아쉬워요. 그래도 욕심내서 물량을 늘릴 생각은 없어요. 무턱대고 많이 공급하기 보다는 조심스럽게 ‘꿀술’의 문화를 만들어 가야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어떤 잔에 마시는 것이 좋은지, 어떤 음식, 어떤 무드와 어울리는지 등을 제시하면서 성장해나갈 생각이에요. 올 하반기에는 전국 양봉투어를 다니며 양봉업자분들도 만나보고, 꿀술을 더 열심히 연구해야죠.”(양유미) (끝) / phn0905@hankyung.com (장소 협찬_올리앤로렌스(02-323-3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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