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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에 빠진 르까프, 화승그룹은 건재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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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만 중소기업부 기자) 국내 스포츠 브랜드 르까프를 갖고 있는 화승이 지난달 31일 서울회생법원에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프로스펙스와 함께 1980년대 국내 스포츠 브랜드 전성시대를 열었던 르까프였다. 침체의 시기를 지나 2000년대 중반 워킹화가 인기를 얻으면 다시 반짝하기도 했다. 하지만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화승이 법정관리를 신청하자 수많은 질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화승인더스트리 화승알앤에이 화승엔터프라이즈 등 3개 상장사를 비롯한 다른 화승이 앞에 붙은 회사와는 어떤 관계인지, 화승이 오랜기간 쌓아온 신발제조 노하우는 어디로 가는지, 협력사들은 얼마나 많은지 등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법정관리를 신청한 화승은 다른 화승이 붙은 회사와는 큰 관련이 없다. 화승그룹은 7일 “2015년 패션스포츠 사업인 (주)화승을 사모펀드에 매각했다”며 “이번 기업회생 신청은 (주)화승에만 국한돼 있다. 이로 인한 그룹에 큰 영향은 없다”고 밝혔다. 화승그룹은 종합무역, 자동차 부품, 소재, 화학, 신발 ODM 등을 주력사업으로 하고 있다.

◆3번째 부도를 맞은 화승

화승과 화승그룹의 시작은 1953년 고무신을 만들던 동양고무공업주식회사로 거슬러 올라간다. 창업주인 고(古) 현수명 전 회장은 부산 초량동 공장에서 고무신을 만들면서 사세를 키웠다. 1957년 상호를 동양고무산업으로 바꿨고, 1960년 종업원 수는 2000명에 달했다. 1965년엔 기차표 상표를 등록했다. 왕자표와 함께 고무신 시장을 양분하던 기차표 고무신이 화승에서 나왔다.

화승은 이번 법정관리에 앞서 두 번의 부도가 있었다. 첫번째 부도는 1966년이었다. 원자재 가격 상승과 과열 경쟁으로 자금난에 처했다. 현 전 회장은 당시 법정 관리를 승인받고 풍영화성(화승인더스트리의 전신)을 설립하고 하루 4000켤레 운동화를 생산해 위기를 극복했다. 1974년 법정관리를 벗어났다.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는 화승의 전성기였다. 1978년 미국 나이키 운동화를 주문자상표부착방식(OEM)으로 생산하기 시작했다. 1980년부터는 기업명도 화승으로 바꿨다. 자신감을 얻은 화승은 1986년 자체 브랜드 ‘르까프’를 선보였다. 월드컵도 화승의 브랜드다. 나이키 제품을 만들 기술력이면 독자 브랜드로도 승부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화승은 이를 통해 한때 재계 서열 22위까지 올랐다.

화승의 두번째 위기는 1997년 외환위기 직후에 찾아왔다. 1998년 12개의 계열사 중 화승상사, 화승관광개발 등 계열사가 부도를 맞았다. 부채 2832억원을 막지 못했다. 위기는 그룹 전체로 번졌다. 계열사 절반인 6개 회사를 정리하고, 화승과 화승상사를 합병했다. 르까프, 캐필드, 월드컵 등 6개 브랜드 중에서 르까프와 월드컵 두 개만 남겨 두고 나머지는 접었다. 화승그룹은 6년만인 2005년 화의에서 벗어났다.

이때부터 화승그룹의 주력 사업은 자동차 부품과 정밀화학 등으로 사업을 다각화했다. 화승알앤에이는 자동차용 고무 관련 부품을 만든다. 화승인더스트리는 포장지 등에 사용하는 필름 제품을 생산한다. 전통 사업 분야인 스포츠 브랜드는 (주)화승에서 맡았다.

◆Z세대가 외면한 브랜드

화승그룹과 화승이 분리되기 시작한 것은 2013년부터다. 화승그룹은 (주)화승의 지분 절반을 물류기업인 경일에 매각했다. 화승그룹과 경일은 이후 사업의 시너지가 생각만큼 크지 않다고 판단해 경영권을 포기하고 2015년 산업은행(KDB)과 KTB PE(사모펀드)에 지분을 전량 넘겼다. 화승그룹 관계자는 “이 시기를 전후로 르까프와 화승은 국내에 신발 생산 공장이 없는 유통회사로 변모했다”며 “지분 매각후 화승이라는 이름을 쓰는 조건으로 화승그룹이 로열티를 받았다”고 설명했다.

스포츠 브랜드와 ‘르까프’와 아웃도어 브랜드 ‘머렐’ 등을 생산·유통하던 화승은 인수 이후 줄곧 내리막길을 걷는다. 2014년 5619억원에 달했던 매출은 2015년 2363억원으로 ‘반토막’이 났다. 2016년 매출은 3013억원으로 반등했지만, 190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2017년에는 매출 2635억원, 영업손실 150억원을 기록했다.

낡은 브랜드 이미지가 르까프 부활의 발목을 잡은 것으로 업계는 분석했다. 르까프는 2015년 ‘꽃보다 할배’에 출연한 이서진을 모델로 내세워 1980년대 광고를 패러디하는 광고를 선보였다. 광고는 인기를 모았다. 하지만 인기는 광고에 그쳤다. 오래된 브랜드라는 이미지를 심어주면 주 소비층인 20~30대로부터 외면을 받았다. 브랜드 노화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화승이 갖고 있던 또다른 브랜드 머렐과 케이스위스도 아웃도어 시장에 큰 영향을 미치는 10대, 20대 사이에서는 별다른 인기를 얻지 못했다.

◆세계 최대 신발 공장 보유한 화승그룹은 건재

화승그룹은 화승을 매각한 후에도, 지금도 신발산업의 인프라는 그대로 갖고 있다. 화승그룹 계열사인 화승엔터프라이즈는 자회사인 화승비나를 통해 아디다스와 리복의 운동화를 주문자상표 부착생산(OEM) 방식으로 생산하고 있다. 지난해 매출은 9000억원대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화승비나는 특히 2002년 베트남 동나이에 설립한 세계 최대의 신발제조공장을 갖고 있다.

1978년 설립한 화승알앤에이도 자동차 부품 소재 기업으로 입지를 다지고 있다. 이 회사는 고무로 된 자동차 부품소재 등을 생산한다. 연간 매출이 1조원을 훌쩍 넘는다. 화승그룹 관계자는 “르까프와 같은 브랜드가 소비자에게 널리 알려졌지만, 2000년대 들어 화승그룹에서 차지하는 사업 비중은 크지 않았다"며 “OEM과 정밀화학과 소재사업 등을 중심으로 사업을 펼치고 있다”고 설명했다.

화승그룹과 화승이 분리돼 있어 화승그룹에는 별다른 영향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화승 협력업체는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화승이 보유한 브랜드 제품을 주로 판매하는 대리점, 화승에 소재를 납품하는 협력사 등은 어려움에 처할 것으로 보인다. (끝) / mg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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