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7 판문점 선언’을 출발점으로 대장정에 돌입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는 어느덧 8개월째로 접어들고 있다. 과거 6자회담 등 북핵 협상의 전례를 감안하면 그리 긴 시간은 아니지만 기존에 이루지 못했던 성과들을 단번에 이뤄낸 터라 체감상 흘러온 시간이 꽤 길게 느껴진다. 이제 김정은 답방과 2차 미·북 정상회담만 제대로 이뤄진다면 북한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은 전례없는 진전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2018년 북핵 협상의 가장 큰 특징은 ‘톱 다운’ 방식이라는 점이다. 남북과 미국의 ‘톱’이 양자회담을 통해 결정을 내리면 실무진들이 ‘액션 플랜(실행 계획)’을 만드는 식이다. 그렇다보니, 3국 대표 협상가의 성정과 기질는 협상 결과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다. 협상가로서 문 대통령의 성향은 세 번에 걸친 남북정상회담과 여섯 번의 한미정상회담을 거치면서 어느 정도 굳어졌다. 문재인 대통령은 남북평화에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으며, ‘나의 선의(善意)가 충분히 전달되면, 상대방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란 확신을 갖고 있다. 게다가 남의 말을 잘 경청할 줄 알며, 노무현 대통령 시절 남북정상회담을 실무지휘한 경험까지 갖추고 있다. 미·북 비핵화 협상의 중재자로서는 최적인 셈이다.
다만, 일본 등 외부에선 문 대통령이 다소 감정적(emotional)인 접근법에 경도돼 있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한미동맹 균열 얘기가 나올 정도로 남북관계의 진전을 우선시하는 몇가지 정책들이 이 같은 불안감을 키웠다. 지난달 일본에서 만난 외무성 등 현지 관료들 사이에선 ‘문 대통령이 김정은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대할 때 등가의 원칙을 갖고 중재자의 역할을 하는 지 의문’이란 평가가 자주 들렸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김정은과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평가다. 세차례의 남북정상회담과 6월 싱가포르 센토사섬에서 열린 1차 미·북 정상회담에서 김정은은 ‘비이성적인 독재자’라는 이미지를 완전히 불식시켰다. 트럼프 대통령과의 회담 후 센토사섬의 야경을 즐기며, 현지인들과 거리낌없이 사진을 찍는 모습은 ‘은둔의 지도자’라는 인식을 깨버렸다. 한국 사회에서 ‘김정은 찬양’과 ‘김정은 답방 환영’이란 문구가 등장하는 것만 봐도 지난 8개월 간 김정은이 얻은 게 얼마나 많은 지를 짐작할 수 있다. 스위스 유학 경험과 젊은 지도자라는 환상까지 더해져 일종의 ‘아이돌’ 같은 이미지를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거꾸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이미지는 시간이 흐를수록 ‘예측이 불가능한 돌아이’로 굳어져가고 있다. 다니엘 드레즈너 미 터프츠대 교수는 지난 4일 워싱턴포스트에 기고한 글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협상을 전형적인 포템킨(겉은 번지르르하지만 속은 썪은)형이라고 정의했다. 위기를 조장하고 상대방을 협박해서 회담을 연 뒤, 결과적으론 위기를 지연시킬 뿐 얻은 건 별로 없는 협상이라는 것이다. 드레즈너 교수는 트럼프 대통령에 대해 “그는 디저트를 가장 먼저 먹고는 마치 모든 메뉴를 다 먹은 것처럼 얘기하는 인물”로 묘사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원하는 건 그저 현상유지를 깨는 것 정도고 실제 그가 무엇을 원하는 지는 알기 어렵다고도 했다.
이쯤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말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그가 자신의 대북정책을 자찬할 때 늘 구사하는 ‘레토릭’이 두 가지다. 하나는 “김정은과 사랑에 빠졌다”는 것이고, “북한은 지난 1년간 미사일도 안 쏘고, 핵실험도 안한다”이다. 드레즈너의 분석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이미 ‘디저트’까지 먹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센토사 선언’의 비핵화(denuclearization)라는 단어와 관련해 미국과 북한 간 완전히 해석이 다를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김정은은 단계적 비핵화 조치에 대한 댓가로 빠른 시일 안에 제재완화 등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것으로 해석한 데 반해 트럼프 대통령에게 비핵화란 ‘님트(Not in My Term, 자신의 임기 동안만 아니면 된다)’의 대상일 수 있다는 얘기다.
김정은이 서울 답방을 고심하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미국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는 점이 서울행을 주저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만일 김정은이 좀 더 오랜 시간 두문불출한다면 향후 상황은 어떻게 전개될까. 트럼프 대통령으로선 이런 판단을 할 가능성이 높다. ‘김정은은 미친 독재자가 아니다. 위협한다고 해서 핵버튼을 누르지는 않을 것이다’. 북한 문제가 트럼프 책상 위 우선순위에서 점차 멀어질 날에 대비해 우리 정부는 어떤 대비책을 갖고 있나. (끝)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