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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휘의 한반도는 지금) 한반도 평화 '8개월 대장정'이 드러낸 역설...'돌아이' 트럼프, '아이돌' 김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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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휘 정치부 기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서울 답방’이 장안의 화제다. 청와대는 연내 실현 가능성에 여전히 무게를 싣고 있다. 김정은이 ‘연내 답방’이란 ‘9·19 평양선언’의 약속을 지키냐 마냐는 문재인 대통령으로선 사활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김 위원장은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라는 문 대통령의 발언만 봐도 그 심중을 알 수 있다. 김정은의 ‘일언(一言)이 ‘중천금(重千金)’처럼 지켜져야 향후 비핵화 프로세스도 원활히 진행될 것이라는 게 청와대의 셈법이다.

‘4·27 판문점 선언’을 출발점으로 대장정에 돌입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는 어느덧 8개월째로 접어들고 있다. 과거 6자회담 등 북핵 협상의 전례를 감안하면 그리 긴 시간은 아니지만 기존에 이루지 못했던 성과들을 단번에 이뤄낸 터라 체감상 흘러온 시간이 꽤 길게 느껴진다. 이제 김정은 답방과 2차 미·북 정상회담만 제대로 이뤄진다면 북한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은 전례없는 진전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2018년 북핵 협상의 가장 큰 특징은 ‘톱 다운’ 방식이라는 점이다. 남북과 미국의 ‘톱’이 양자회담을 통해 결정을 내리면 실무진들이 ‘액션 플랜(실행 계획)’을 만드는 식이다. 그렇다보니, 3국 대표 협상가의 성정과 기질는 협상 결과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다. 협상가로서 문 대통령의 성향은 세 번에 걸친 남북정상회담과 여섯 번의 한미정상회담을 거치면서 어느 정도 굳어졌다. 문재인 대통령은 남북평화에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으며, ‘나의 선의(善意)가 충분히 전달되면, 상대방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란 확신을 갖고 있다. 게다가 남의 말을 잘 경청할 줄 알며, 노무현 대통령 시절 남북정상회담을 실무지휘한 경험까지 갖추고 있다. 미·북 비핵화 협상의 중재자로서는 최적인 셈이다.

다만, 일본 등 외부에선 문 대통령이 다소 감정적(emotional)인 접근법에 경도돼 있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한미동맹 균열 얘기가 나올 정도로 남북관계의 진전을 우선시하는 몇가지 정책들이 이 같은 불안감을 키웠다. 지난달 일본에서 만난 외무성 등 현지 관료들 사이에선 ‘문 대통령이 김정은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대할 때 등가의 원칙을 갖고 중재자의 역할을 하는 지 의문’이란 평가가 자주 들렸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김정은과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평가다. 세차례의 남북정상회담과 6월 싱가포르 센토사섬에서 열린 1차 미·북 정상회담에서 김정은은 ‘비이성적인 독재자’라는 이미지를 완전히 불식시켰다. 트럼프 대통령과의 회담 후 센토사섬의 야경을 즐기며, 현지인들과 거리낌없이 사진을 찍는 모습은 ‘은둔의 지도자’라는 인식을 깨버렸다. 한국 사회에서 ‘김정은 찬양’과 ‘김정은 답방 환영’이란 문구가 등장하는 것만 봐도 지난 8개월 간 김정은이 얻은 게 얼마나 많은 지를 짐작할 수 있다. 스위스 유학 경험과 젊은 지도자라는 환상까지 더해져 일종의 ‘아이돌’ 같은 이미지를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거꾸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이미지는 시간이 흐를수록 ‘예측이 불가능한 돌아이’로 굳어져가고 있다. 다니엘 드레즈너 미 터프츠대 교수는 지난 4일 워싱턴포스트에 기고한 글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협상을 전형적인 포템킨(겉은 번지르르하지만 속은 썪은)형이라고 정의했다. 위기를 조장하고 상대방을 협박해서 회담을 연 뒤, 결과적으론 위기를 지연시킬 뿐 얻은 건 별로 없는 협상이라는 것이다. 드레즈너 교수는 트럼프 대통령에 대해 “그는 디저트를 가장 먼저 먹고는 마치 모든 메뉴를 다 먹은 것처럼 얘기하는 인물”로 묘사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원하는 건 그저 현상유지를 깨는 것 정도고 실제 그가 무엇을 원하는 지는 알기 어렵다고도 했다.

이쯤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말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그가 자신의 대북정책을 자찬할 때 늘 구사하는 ‘레토릭’이 두 가지다. 하나는 “김정은과 사랑에 빠졌다”는 것이고, “북한은 지난 1년간 미사일도 안 쏘고, 핵실험도 안한다”이다. 드레즈너의 분석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이미 ‘디저트’까지 먹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센토사 선언’의 비핵화(denuclearization)라는 단어와 관련해 미국과 북한 간 완전히 해석이 다를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김정은은 단계적 비핵화 조치에 대한 댓가로 빠른 시일 안에 제재완화 등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것으로 해석한 데 반해 트럼프 대통령에게 비핵화란 ‘님트(Not in My Term, 자신의 임기 동안만 아니면 된다)’의 대상일 수 있다는 얘기다.

김정은이 서울 답방을 고심하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미국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는 점이 서울행을 주저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만일 김정은이 좀 더 오랜 시간 두문불출한다면 향후 상황은 어떻게 전개될까. 트럼프 대통령으로선 이런 판단을 할 가능성이 높다. ‘김정은은 미친 독재자가 아니다. 위협한다고 해서 핵버튼을 누르지는 않을 것이다’. 북한 문제가 트럼프 책상 위 우선순위에서 점차 멀어질 날에 대비해 우리 정부는 어떤 대비책을 갖고 있나. (끝) /donghui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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