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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뒷 얘기

(박동휘의 한반도는 지금) 악화일로 한일관계, 준비 안된 '결기'는 도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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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휘 정치부 기자) 한일 관계의 근간은 1965년에 체결된 한일협정이다. 양국 간 국교가 정상화된 조약으로 ‘포괄적 경제 배상’이 핵심이다. 미국의 중재로 성사된 당시 협정은 수많은 반발에도 불구하고, 전후 재건을 위해 과거를 묻어두자는 위정자의 한 마디에 빛을 보게 됐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한일외교사의 시작을 1965년으로 보는 이유다.

올해로 20주년을 맞은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은 한일관계에 새로운 이정표로 기억될만한 사건이다. 1998년 10월 김대중 당시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당시 일본 총리가 채택한 공동선언은 양국의 미래지향적 관계를 중시하면서도 오부치 총리가 사죄하는 내용을 중요하게 담았다. 지난 9월 말엔 도쿄에서 한일의원연맹 소속 의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전망’이란 주제로 학술 심포지엄이 열리기도 했다.

한일협정 이후 53년을 유지해 온 한일 양국은 요즘 최악의 시련을 겪고 있다. 일장기를 게양한 일본 해군의 제주 관함식 참가 논란에서 시작된 반일 정서는 급기야 지난 10월 말, 대법원이 강제징용 피해자의 손을 최종적으로 들어주면서 최고조에 달했다. 지난달엔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배상을 위해 만든 화해·치유재단을 해산시켰다. 한일관계는 이미 ‘루비콘 강을 건넜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일본 외교 전문가들은 ‘1965년 한일협정 이전으로 되돌아간 것’이라고도 말하고 있다.

아베 신조 총리를 비롯해 일본 외무성 등은 연일 격앙된 반응을 쏟아내고 있다. 재일 한국 기업에 대한 보복 조치 가능성도 언급된다. 국제법에 호소할 것이란 전망도 우세하다. 일본 외교가의 ‘코리안 스쿨’에서조차 ‘한국 피로증’을 얘기하고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면, 저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된 것처럼 보였던 문제도 다시 꺼내는 식’에 피로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골대’를 옮기며 일본에 사과를 요구하는 한국에 대해 일본 내 전문가들 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들도 염증을 느끼고 있다는 게 요즘 일본의 현지 사정이다.

당분간 이같은 국면이 해소되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한국 입장에선 3권 분립이란 원칙을 감안하면 사법부의 결정을 행정부가 왈가왈부할 수 없게 됐다. 외교관계에 있어 정부는 한 목소리만 낸다는 ‘원 보이스 독트린’이 깨져버린 것은 아쉬운 점이지만 이제 와서 깨진 그릇을 다시 맞출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아베 외교의 핵심은 ‘강한 일본의 귀환(Japan is Back)’이다. 과거 일본의 영광을 재현하고, 떨어진 일본의 위신을 살리겠다는 얘기다. 실제 아베 총리는 역대 어떤 총리보다 활발한 대외 활동을 펼치고 있다. 한일관계와 관련해서도 일본의 고위 관료들은 “중국에 대해선 한번도 하지 않았던 사과 담화문만 한국을 위해 수십번 내지 않았냐”고 항변한다. 상당수의 일본 대중들 역시 ‘사과하는 일본’을 더 이상 원치 않는다.

현재 한일 관계는 동면 상태에 가깝다. 외교부조차 일본과의 일체 접촉을 피하고 있다. 자칫 잘못 움직였다간 ‘역적’ 취급받을까 전전긍긍할 정도다. 우선 국내 문제부터 해결하자는 게 외교부의 전략인 것으로 알려졌다. 예컨데 일본이 배상금으로 제공한 화해·치유 재단의 설립금을 어떻게 할 지부터 위안부 및 시민단체들과 협의해야한다는 것이다. 일본에 배상금 전액을 되돌려주는 일은 사실상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이것만큼은 피하자는 게 외교부의 ‘대책 아닌 대책’이다.

1965년 한일협정은 그 자체로 수많은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일제 치하의 수많은 억울함들을 도외시한 채 이를 물질적 배상으로 갈음한 것으로, 당시에도 국치(國恥)라는 불만이 끊이지 않았다. 이런 주장은 지금도 유효하다. 경제적 배상금이 어떻게 쓰였는 지도 논쟁 대상 중 하나다. 한일협정의 근간을 흔들만큼 한일관계의 전면적 쇄신을 요구하는 올해 일련의 사건들은 지난 53년 동안 해결하지 못했던 역사적 매듭을 짓기 위한 절호의 기회일 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한가지 꼭 확인해야할 일이 있다. 한일관계를 53년 전으로 되돌려 역사적 매듭을 짓겠다는 문재인 정부의 결단이 과연 ‘준비된 결기’인가 하는 점이다.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한다’, ‘투트랙 전략은 유효하다’는 류의 화법은 회피에 가깝다. 적어도 정치, 외교, 군사·안보, 경제, 문화, 사회 등 각 영역에서 불어닥칠 ‘쓰나미’급 후폭풍에 대한 ‘컨틴전시 플랜’이 마련돼 있는 지 묻고 싶다. 준비 안된 결기는 도박에 가깝다. (끝) / donghui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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