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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밍고의 노래 한곡은 6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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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정진 문화부 기자) ‘세기의 거장’으로 불리는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가 내한공연에서 부른 한 곡의 값어치는 얼마일까요?

지난 26일 서울 잠실실내체육관에서 열린 ‘2018 플라시도 도밍고’ 내한공연을 다녀온 뒤 문득 든 생각이었습니다. 매진된 SVIP석이 55만원이었고, VIP석이 33만원, R석이 22만원, 제일 싼 가격인 A석과 B석이 각각 9만9000원, 5만5000원이었습니다. 공연 전부터 초고가 티켓 논란이 일었음에도 불구하고 7000석이 매진됐고 이날 공연장은 관객으로 발디딜 틈이 없었습니다.

관객으로서 도밍고의 가치를 생각해보면 티켓 값이 그리 비싼 게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번 공연 프로그램은 총 18곡이 준비됐는데요. 그중 도밍고가 부른 곡은 솔로곡 4곡, 푸에르토리코 출신 소프라노 아나 마리아 마르티네스와 함께 부른 5곡을 포함에 총 9곡이었습니다. SVIP석을 기준으로는 아리아 한 곡당 6만원, 최저가 B석으로 보면 1곡당 6000원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연주자 초청료와 무대 대관료, 음향 설치 및 홍보 마케팅 비용, 각종 부대비용 등을 빼면 도밍고의 한 곡당 가치는 그 이하일 수도 있습니다.

특히 세계 3대 테너로 칭송받았던 그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다는 감동은 그 값어치를 매기기 힘듭니다. 77세 희수의 나이에도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는 젊은 시절 호기롭게 고음의 아리아를 뽑아내던 테너 도밍고와 비교해도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백발에 흰 수염을 기른 모습으로 무대에 오른 도밍고는 3시간 동안 평소 집에서 편하게 연습하는 듯한, 여유있는 미소와 제스처로 공연해 보는 이로 하여금 ‘역시 거장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사실 닭살 돋게 하는 화려한 고음을 자랑하는 곡은 거의 없었습니다. 기껏해야 후렴구에 강하게 3~5초 반짝 비브라토로 올려 부르는 고음이 유일했습니다. 대부분 테너 곡이 아니라 바리톤 음역의 곡이었습니다. 1부에선 2009년 다시 바리톤으로 전향한 계기가 된 오페라 ‘시몬 보카네그라’의 ‘울어라 눈물들이여’를 불렀는데요. 2부 레퍼토리에서 부른 뮤지컬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중 ‘투나잇’, 오페라 ‘사랑의 속삭임’ 중 ‘이제 행복한 시간들’ 역시 강한 고음은 많지 않은 곡입니다. 이번 공연에서 부른 그의 노래에선 고속 직구로 타자를 윽박지르는 신인투수의 젊음보다는 변화구로 타자들을 맞춰 잡는 20년차 베테랑 투수의 노련함이 엿보였습니다.

루치아노 파바로티, 호세 카레라스와 함께 세계 3대 테너로 불리던 그는 1961년 이후 47년간 이어오던 테너 생활을 접고 2009년 바리톤으로 전향해 제2의 음악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전율하게 만드는 고음은 많지 않았지만 공연 내내 특유의 힘 있는 발성, 가슴 한구석을 뭉클하게 만드는 애절한 중저음으로 보는이로 하여금 절절한 옛 추억을 떠올리게 만들었습니다. 세월이 그런 여유를 만들어냈는지 한 편의 오페라를 보는 듯 그는 시종일관 강렬한 눈빛과 시선, 섬세한 몸짓으로 드라마틱한 연기를 선보였습니다.

이날 무엇보다 돋보였던 것은 무대 음향 시설이었습니다. 정말 믿을 수 없었는데요. 잠실실내체육관은 그동안 ‘동굴 체육관’이라고 불릴 만큼 스피커가 메아리치는 등 울림이 심한 공연장으로 유명했습니다. 이 때문에 성악가 공연은 물론 대중가수들조차 울림 때문에 소리가 효과적으로 전달되지 않는 어려움을 겪는다고 토로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이날 무대에선 체육관이라고 보기 어려울 만큼 울림을 잘 잡아냈습니다. 콘서트홀이나 오페라극장과 달리 넓은 공간에선 효과적으로 소리를 전달하기 힘든 탓에 부득이 마이크를 써야 했습니다. 하지만 도밍고의 목소리와 스피커와 화면을 통해 전달되는 소리의 오차는 거의 ‘0’에 가까웠습니다. 체육관이라는 한계를 고려한다면 사전 음향팀의 철저한 조율 덕분인지 울림도 거의 없어 도밍고의 음절 하나하나가 그대로 전달됐습니다.

앙코르 곡으로 도밍고가 중후하면서도 감미로운 목소리로 ‘베사메 무초’를 열창하자 관객들은 팝콘서트장처럼 ‘떼창’으로 화답하는 등 여느 팝스타 못지 않은 분위기를 연출했습니다. 뒤이어 오페레타 ‘유쾌한 미망인’의 ‘입술은 침묵하고’를 부르며 아나 마리아 마르티네스와 손잡고 왈츠를 추는 장면까지 선보이자 관객의 환호성은 절정에 달했습니다. 마지막 앙코르 곡으로 옥색 쾌자(조끼 형태의 한복)를 두르고 나와 소프라노 임영인과 함께 한국 가곡 ‘그리운 금강산’을 부르자 7000석 객석에서 메아리치는 환호는 값을 매기기 어려울 정도의 감동을 전해줬는데요. 도밍고의 입에서 ‘수수만년 아름다운 산/못 가본지 몇몇 해/ 오늘에야 찾을 날 왔나/ 금강산은 부른다….”라는 구절을 또박또박 듣는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행운이었습니다.

‘살아있는 전설’의 단 하루짜리 무대였지만 희수(喜壽)인 77세의 나이를 무색케 하는 에너지에 ‘클래스는 영원하다’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한편으론 폴 매카트니의 공연을 보며 일찍 떠나간 그의 친구 ‘존 레넌’을 회상하듯, 관객들은 도밍고의 무대를 보며 그와 함께 찬란했던 ‘루치아노 파바로티’를 계속 떠올렸을 것 같습니다. 그의 목은 여전히 팔팔했지만 언제 또 다시 우리는 서울 한복판에서 그의 목소리를 그렇게 감동하며 들을 수 있을까요. 기적의 목소리에 가깝다고 평가받는 살아 생전 그의 목소리를 기약없이 기다려야한다는 갈증은 아마 55만원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무한한 가치가 아닐까 싶습니다. (끝) /silve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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