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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뒷 얘기

빌 게이츠, 손정의 같은 ‘책 이야기’를 가진 한국의 경영자는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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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현 문화부 기자) 문재인 대통령이 여름 휴가 기간 읽은 책들이 공개되면서 해당 도서들의 판매량이 크게 늘었습니다. 이달 초 문 대통령이 휴가지인 계룡대에서 책을 읽고 있는 사진과 함께 한 책은 광주민주화운동을 배경으로 한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 구한말 민중들의 삶을 그린 김성동 작가의 '국수', 그리고 기자가 쓴 방북 취재기 '평양의 시간은 서울의 시간과 함께 흐른다'입니다. 청와대가 SNS를 통해 책 제목을 공개한 후 주요 서점에서 해당 도서들의 판매량이 20% 안팎으로 증가했습니다.

일부에서는 대통령이 ‘찍은’ 책들의 편향과 이 불경기에 그 책들만 잘 나가는 것을 불편한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하지만 그렇게만 볼 일은 아닙니다. 대통령이 읽는 책을 공개한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대통령‘만’ 도서 목록을 내놓은 것이 문제입니다.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 여러 분야 저명 인사들이 요즘 어떤 책을 읽었고 이런 책이 저런 면에서 좋았다고 더 많이 얘기해야 하지 않을까요.

‘2017 국민독서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난 1년간 일반 도서(교과서, 학습참고서, 수험서, 잡지, 만화 제외)를 한권이라도 읽은 사람의 비율(독서율)은 성인 59.9%, 학생 91.7%였습니다. 성인 10명 중 4명은 1년에 책을 한권도 안 읽는다는 의미입니다. 문제는 이를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본인의 독서량에 대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성인의 비율은 2011년 74.5%에서 2013년 67.0%, 2015년 64.9%, 2017년 59.6%로 지속해서 감소하고 있습니다. 독서를 왜 해야 하는지, 그 필요성에 대한 인식도 옅어지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책을 안 읽다보니 시장은 작은 자극에도 크게 반응합니다. 드라마 등 TV에 잠깐 등장해 책들이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르면서 미디어셀러라는 단어도 등장했습니다. 올해도 드라마 ‘키스 먼저 할까요’에서 나희덕 시인의 시집에 등장하면서 시집 판매량이 급증했고 tvN 예능 프로그램 ‘숲 속의 작은 집’에서 출연자가 사노 요코의 책 '죽는 게 뭐라고'를 읽자 단숨에 베스트셀러에 진입했습니다.

막연하게라도 ‘책을 읽어야 한다’라는 부채 의식은 갖고 있지만 막상 읽으려니 ‘무엇을 읽어야 할지’ 몰라 하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안내서 역할을 한 것입니다. 지난 번 책 관련 행사에서 만난 한 정치인에게 “요즘 무슨 책을 읽고 있냐”며 “최근 읽은 책 중 괜찮았던 책을 추천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책 한권만 그렇게 언급하면 나머지 다른 출판사들이 섭섭해 한다”고 웃으며 답변을 얼버무렸습니다. 갑자기 물어서 최근 읽은 책이 기억이 안 났던 걸까요, 아니면 근래 읽은 책이 없는 걸까요. 정말 국내 4만여 곳의 출판사들이 한 곳만 언급했다고 섭섭해할 것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출판사의 ‘부탁’을 받고 소개하는 것이라고 오해할까봐 걱정됐다면 ‘진짜 괜찮은 책’을 추천하면 되지 않을까요.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책을 추천하는데 인색하지 않았습니다. 대통령 재임 시절 늘 여름 휴가지에서 갖고 가서 읽은 책 목록을 공개했죠. 재임 기간 그가 추천한 책은 80권이 넘습니다. 백악관을 떠난 뒤에도 가끔 페이스북을 통해 자신의 읽은 책, 추천하고 싶은 책을 소개합니다. 빌 게이츠의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의 추천 도서도 유명하죠. 빌 게이츠가 자신의 블로그에 올리는 자세하고 꼼꼼한 서평도 많은 사람들이 읽습니다.

마크 주커버그 페이스북 창업자는 3년 전 “1중일에 한 권씩 책을 읽을 것”이라고 선언하면서 함께 독서에 동참할 것을 주위에 권유했습니다. 당시 첫번째 읽을 책으로 모이세스 나임의 '권력의 종말'을 꼽아 화제가 되기도 했죠. ‘책 읽는 경영자’라고 하면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 떠오릅니다. 스물넷의 나이에 두명의 직원으로 소프트뱅크를 창업해 2년 후 직원 125명, 매출 45억엔인 회사로 성장시켰죠. 하지만 얼마 후 B형 간염에 걸려 입원을 하게 됩니다. 3년 넘게 병원 신세를 지면서 그는 4000권의 책을 읽었다고 합니다. 그 많은 독서량이 사업과 사람, 그리고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을 키운 것은 아닐까요.

빌 게이츠나 손정의 회장 같은 ‘책 이야기’를 가진 한국의 경영자는 누가 있을까요. 교보문고 창업주인 신용회 회장은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했습니다. 더 넓게 더 멀리 세상을 내다봐야 하는 사회의 지도층이 많은 책을 읽고 추천해 신선한 자극을 보다 널리 퍼뜨려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끝) / hit@hankyung.com

오늘의 신문 - 2024.05.08(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