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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달의 저편' 리뷰...절정의 입체 예술이 펼쳐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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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경 문화부 기자) 거대한 입체의 예술이 펼쳐졌습니다. 무대는 물론 인물, 이야기까지 극의 모든 요소가 다면적이고 공감각적으로 작동했습니다. 작은 집이 어느 순간 우주로 변하기도 하고, 세탁기 문이 달로, 형이 동생과 엄마로 자유자재로 바뀌어 있는 식이었죠.

지난 16~19일 LG아트센터에서 열린 캐나다 출신의 거장 로베르 르파주(61)의 연극 ‘달의 저편’ 얘기입니다. 놀라운 건 오직 한명의 배우가 하나의 무대에서 움직이고 있을 뿐이라는 겁니다. 기존 연극에선 볼 수 없었던 기발하고 경이로운 공연이었습니다.

내용은 단순해 보입니다. 고인이 된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기 위해 만난 형제의 갈등을 다루는데요. 그런데 이 얘기는 또 다른 얘기와 중첩되며 전개됩니다. ‘달 탐사’를 둘러싼 미국과 옛 소련 간 치열한 우주개발 역사와 연결짓는 것이죠. 주인공 필립과 앙드레 형제의 갈등이 곧 미국과 소련의 대결이 장면마다 교차하며 펼쳐집니다.

이 교차의 시작은 처음에 나오는 형 필립이 세탁기 문을 열고 빨래를 집어넣다가 아예 스스로 세탁기 문으로 들어가버리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무대와 영상의 색다른 활용으로 공간과 또다른 공간을 연결하는 파격을 선보이게 되는 것이죠. 세탁기 문은 벽에 부착돼 있고 세탁기 안엔 카메라가 있습니다. 카메라는 필립이 세탁기 안으로 들어가자 그를 비춥니다. 이 영상은 벽에 그대로 투사되는데요. 동그란 세탁 문이 달처럼, 필립은 우주 비행사처럼 보입니다. 또 세탁 과정도 비추는데요. 물과 세제가 섞여 출렁이는 모습은 달의 표면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움직임처럼 보입니다.

이후에도 영상은 큰 역할을 해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입체성의 핵심엔 거울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거울을 활용한 우주 유영 장면은 압권이었는데요. 필립이 바닥을 뒹굴고 있고 그 위에 거대한 거울이 놓여져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거울과 조명이 반사되면서 마치 거울 위에 펼쳐진 우주에 필립이 자유롭게 떠다니고 있는 것 같은 착시효과가 나타났습니다.

다른 연극이나 뮤지컬에서도 거울은 스스로를 비추며 내면을 들여다보게 하는 장치로 많이 사용되는데요. 이 공연에선 단순히 거울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는 내면을 비추는 식에서 더 나아가 미지의 공간에 인간 자체의 아름다움과 자유로움을 구현하는 역할을 해냈습니다.

형이자 동생, 엄마로서의 역할을 모두 해낸 단 한명의 배우 이브 자끄의 연기도 훌륭했습니다. 특히 원피스를 입고 하이힐을 신은 채 꼿꼿이 걷는 걸음걸이와 움직임은 옛날 엄마의 모습을 표현하는 데 손색이 없었습니다.

한가지 또 놀라운 사실이 있는데요. 이 작품이 18년전인 2000년 퀘벡에서 초연됐다는 점입니다. 한국 무대에는 15년 만에 다시 올랐는데요. 입체 예술의 절정이 오랜 시절 구현됐다는 사실이 감탄스럽습니다.

아쉬운 점은 극강의 입체성에 관객들이 다소 혼란스럽기도 하고 피로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겁니다. 어떤 상황인지, 어떤 인물인지 빠르게 쫓지 못하면 자칫 흐름을 놓칠 수 있는데요. 그래도 놀라운 판타지 선물에 취해 있다보면 이 정도는 얼마든지 극복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끝) / hkki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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