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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뒷 얘기

쓴소리에 북한 연구까지…달라진 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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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정 경제부 기자) “요즘 한국은행에서 나오는 보고서들은 확실히 예전에 비해 읽을 만 해졌습니다.” 한 국내 연구기관 실무자의 평가입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한은에서 나오는 보고서는 제목이나 개요만 확인하고 지나치기 일쑤였는데, 최근 들어선 각종 통계 수치나 보고서가 함의하고 있는 내용을 꼼꼼히 뜯어보게 된다는 말이었습니다.

중앙은행인 한은은 자타가 공인하는 국내 최고의 ‘경제학 두뇌 집단’입니다. 2300여명의 직원 중 경제학 박사만 200명에 육박합니다. 하지만 이 같은 우수 인력을 갖추고도 한은이 내놓는 보고서는 두루뭉술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습니다. 경제 현안에도 제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않고 읽고 나면 원론적인 ‘그저 그런’ 정보의 나열이라는 지적이 많았습니다.

통화신용정책을 담당하는 한은이 너무 적극적으로 외부에 목소리를 냈을 때 받게 되는 외부의 눈총과 압력을 감안해서일 겁니다. 여기에 폐쇄적이고 다소 고립적인 한은 자체의 조직 문화도 어느 정도 작용을 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한은이 좀 더 현실 경제에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의견이 높았고요.

이런 한은 분위기가 이주열 한은 총재의 연임 결정 이후 조금씩 달라지고 있습니다. 이 총재는 이달 초 4년간의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하면서 취임 일성으로 변화화 혁신을 내세웠습니다. 지난 4년간 안정을 우선했다면 앞으로는 업무 수행 과정에서 생산성을 높이고 심도 있는 조사 연구를 통해 경제 현안에 대한 정확한 진단을 내리고 현실성 있는 대안을 제시하는 데 더 노력하겠단 의지였습니다. 직접적으로 “경제 현안 전반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겠다”고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이같은 이 총재의 의지는 당장 한은의 보고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지난 19일 한은은 ‘북한 이탈주민의 신용행태에 관한 연구’ 보고서를 공개했습니다. 탈북자들은 비슷한 경제 수준을 가진 남한 주민들보다 채무불이행 건수가 많다는 게 보고서의 핵심이었습니다. 탈북자들의 경우 은행 대출이 가능한 고신용자(1∼3등급)들도 카드사나 저축은행 등 금리가 높은 제2금융권을 이용하는 것으로 조사됐다는 데이터를 근거로 “탈북자를 위한 별도 금융교육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했습니다.

사실 지난달 이 총재의 연임을 위한 국회 인사청문회 때 한은의 북한 관련 연구에 대한 강도 높은 질책이 나온 적이 있습니다.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남북 관계 개선이 급진됐지만 한은에선 제대로 된 보고서 하나 나오지 않는다”고 비판을 한 겁니다. 2002년부터 2007년까지는 한은의 북한 관련 연구 자료가 40건 이상이었지만 그 이후 10년간 단 7건 밖에 없다는 지적도 이어졌습니다. 이 밖에도 암호 화폐 관련한 연구가 없다는 의견도 있었고요.

당시의 지적을 의식해서인지 지난 16일에는 중앙은행 차원의 디지털 화폐 발행 가능성을 검토한 첫 공식 보고서를 내놨습니다. 한은 소속 직원과 대학 교수의 공동 연구 논문이었습니다. 이 논문에는 한은법이 한은의 거래 대상을 금융회사로 한정하고 있어 현재로서는 개인이나 비금융회사가 직접 한은에 계좌를 트고 디지털 화폐를 예금·인출할 수 없다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또 한은법을 고쳐 한은과 직접 거래가 가능하게 할 경우엔 기존 은행시스템이 붕괴되는 부작용이 있다고 진단했고요. 이와 함께 한은이 디지털 화폐를 매개로 거래자 개인정보를 수집·처리하는 과정에서 정보를 악용할 가능성을 막는 법적 장치도 필요하다고 주문했습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지난 22일엔 최근 일본 경제가 회복세를 보이지만 임금 상승률은 저조하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보고서도 냈습니다. 그러면서 저출산·고령화 등 일본 경제와 공통 분모를 갖고 있는 한국도 일본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경고를 했죠.

문재인 대통령은 이달 초 이 총재에게 임명장을 주면서 “경제에 대한 조사연구 보고서 가운데 한은의 보고서 수준이 가장 높다”고 칭찬을 하고 적극적인 연구물 제공을 주문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한은 입장에선 문 대통령의 이례적인 보고서 언급과 국회 안팎에서 줄곧 제기돼온 비판을 의식하지 않을 순 없을 겁니다. 하지만 이것과는 별개로 이 총재의 연임을 계기로 한은이 좀 더 외부와 소통에 주도적으로 나서면서 중앙은행으로서의 중립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현실 경제에 지속적인 관심을 갖기를 바라봅니다. (끝)/kej@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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