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나가던 마켓컬리가 작년 말 암초를 만났다. ‘오월의 종’ 빵과 떡, 쿠키 등 잘 팔리던 제품들을 앱에서 삭제해야 했다. 식품위생법 제36조 ‘식품 등을 제조·가공하는 영업자는 시설기준에 맞는 시설을 갖춰야 한다’는 규제에 걸린 것. 현실적으로 동네 빵집이나 영세상인들에게 1억~2억원 드는 제조시설을 갖추라고 요구할 순 없었다. 냉동시설이 낙후되고 배송이 느리던 시절 생긴 낡은 법 때문에 사업이 휘청댔다. 1년 넘게 정부에 건의해봤지만 ‘안 된다’는 답만 돌아왔다.
동네 빵집 등 영세상점 식품 제조시설 공유
마켓컬리는 또 다른 스타트업 ‘오버더디쉬(OTD)’와 함께 아이디어를 내 정면 돌파하기로 했다. 두 회사는 오는 7월께 서울 성수동에 ‘한국판 첼시마켓’인 ‘성수연방’을 연다. 첼시마켓은 한때 과자공장이던 공간을 상업시설로 개조하고 주변 소상공인을 끌어들여 미국 뉴욕의 관광명소가 된 곳이다.
마켓컬리와 OTD는 수십 년간 화학공장으로 쓰이던 성수동 851.46㎡의 두 동짜리 건물을 식품 제조와 포장, 소비와 배송을 한곳에서 해결하는 ‘복합 식음료 문화공간’으로 바꾸기로 했다. 식품 제조시설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규제를 뛰어넘겠다는 것이다. 건물 외관은 그대로 둔 채 내부를 전면 리모델링한다. 1층에는 디저트 전문점들이 모이고, 2층에는 식품공장이 들어선다. 소상공인이 ‘성수연방+자기 브랜드’ 이름을 단 제품을 이 공장에서 만들면 마켓컬리는 이를 포장해 전국에 샛별 배송할 예정이다.
‘성수연방’은 규제가 만든 새 모델
OTD는 ‘셀렉트 다이닝’ 전문업체다. 셀렉트 다이닝은 상권과 공간의 특징, 방문객 성향에 따라 음식점이나 카페 등을 모아 입점시키고 관리하는 일종의 프리미엄 푸드코트다. 광화문 D타워의 ‘파워 플랜트’, 스타필드 하남의 ‘마켓로거스’ 등이 모두 OTD의 작품이다. 마켓컬리와 OTD는 성수연방에서 대형 유통 채널에 입점하기 어려운 소상공인, 프리미엄 식품을 만드는 장인들을 한데 모아 하나의 ‘연합체’를 구성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예를 들어 오월의 종 직원 1~2명이 성수연방 공장에 와서 빵을 만들어 온·오프라인 판매를 함께 할 수 있다. 마켓컬리도 배송뿐만 아니라 자체 기획한 제품을 내놓아 사업 영역을 확장할 수 있다.
마켓컬리를 운영하는 더파머스의 김슬아 대표와 손창현 OTD 대표는 성수동이 지닌 지역적 특징에 집중했다. 성수동은 과거 공장 밀집 지역으로 낡은 건물과 주택이 많이 남아 있고, 몇 년 동안 개성 있는 가게들이 모여들며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손 대표는 “제조공장에서는 작은 가게를 운영하는 장인이나 좋은 레시피를 가진 셰프가 자신의 제품을 생산하고, 두 동의 건물 사이 중정은 녹지로 활용해 문화 공간과 피크닉 장소로 운영할 계획”이라며 “한때 생산의 열기로 가득했던 이 지역을 다시 새롭게 되살리는 의미에서 성수동을 택했다”고 말했다.
프리미엄 전통시장 밑그림 나올까
마켓컬리와 OTD는 성수연방이 장기적으로 프리미엄 전통시장의 전 단계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1호점 이후 성수동 지역에만 2~3곳 이상의 ‘성수연방’을 계획하고 있다. 성수연방 1호점의 실험이 성공하면, 다음엔 유럽형 프리미엄 전통시장을 구성해볼 계획이다. 채소 코너는 가락동 OO호, 수산물은 노량진 OO호 등으로 품질 좋은 먹거리를 세련된 공간에 한데 모으는 것이다. 손 대표는 “식품업계가 주로 거대 자본에 의해서만 움직이고 있는데, 먹거리의 다양성을 살리고 소상공인이나 청년 창업가들과 함께하는 하나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며 “맛집 네트워크에 강점이 있는 OTD와 배송에 특화된 마켓컬리가 시너지를 내면 새로운 형태의 온·오프라인 식음료 회사가 탄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성수연방’은 지역 임대료가 올라 상권이 망가지는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대안도 마련했다. 현재 건물을 10년 장기 임차로 계약했고, 2호점부터는 부지를 매입하는 방식으로 전환하기로 했다.
김보라/김대훈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