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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뒷 얘기

가상화폐 이슈에 묻힌 금리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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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정 경제부 기자) “통화정책방향 설명회인데 자꾸 가상통화 얘기만…” 지난 18일 서울 중구 한국은행 본관 2층. 이주열 한은 총재가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날은 올해 처음으로 한은 금융통화위원회 본회의가 열린 날이었습니다. 금통위는 만장일치로 연 1.50%의 기준금리를 동결했고요. 한은은 금리 결정 배경과 앞으로 통화정책방향을 설명하고, 시장과 소통을 위해 금통위 본회의 직후 총재 설명회를 열고 있습니다. 이 총재가 핵심적인 사안을 먼저 설명하고 나면, 기자들이 자유롭게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이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이 총재의 설명이 끝나고 기자들의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올해 경제 성장 전망과 주요 선진국의 통화정책 정상화가 한은 추가 금리 인상에 미치는 영향 등에 대한 간단한 질문이 끝난 뒤 이어진 본격적인 질문은 대부분 가상화폐에 쏠렸습니다.

잇따라 가상화폐 관련 질문이 쏟아지자 이 총재가 다소 불편한 기색을 나타낸 겁니다. 이 총재는 가상화폐 열풍이 한국 경제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 금융안정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면서도 구체적인 답변을 피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가상통화의 경제적 영향은 아무래도 관련 통계가 정비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그것을 구체적으로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이하 생략) 정부 정책이 오락가락 하느냐는 비판에 대해서는 공개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이 자리에서는 적절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가상화폐의 구체적인 경제적 효과나 정부의 규제 대책에 대한 의견을 묻자 이 총재가 내놓은 답변입니다.

사실 가상화폐로 온 나라가 들썩이면서 한은도 그다지 마음이 편하지는 않습니다. 일각에선 중앙은행이 좀 더 가상화폐 이슈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높이고 있습니다. 실제 한은 노동조합은 최근 ‘서민 홀리는 가짜화폐에 적극 대응하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내놓기도 했습니다. “가상화폐가 화폐라는 이름을 달고 유통되며 가난한 서민들을 유혹하는데 통화당국이 이 거짓화폐의 문제점을 주시하고 좀 더 빨리 경고하지 않는 것은 매우 뼈아픈 일”이라는 게 성명서의 핵심이었죠.

이같은 상황을 의식해서인지 이날 이 총재도 늑장대응에 대한 얘기를 꺼냈습니다. “어느 기관이든 간에 고유의 역할과 영역이 있기 마련입니다. 어떤 문제를 대응함에 있어서도 고유의 역할에 적합한 범위 내에서 발언도 해야 되고 대응조치도 취하는 것이 기본 원칙입니다. 특히 가상통화처럼 성격조차 아직도 정확히 규명되지 않은 이런 문제에 있어서는 특히 선을 지켜야 한다고 할까요, 그런 게 필요하다고 봅니다.”

한은도 일찍이 비트코인으로 대표되는 가상화폐에 관심을 갖고 기존 화폐 제도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기존 결제시스템에 영향을 미칠지 등에 대한 관심을 갖고 연구를 하고 있지만 아직 직접 대응을 취할 단계는 아니라는 말이었습니다. 한은 고유의 역할, 한은이 할 수 있는 역할 범위 내에서 대응을 하고 있다는 의미였습니다. 이미 작년 말부터 기회가 있을 때 마다 ‘비이성적 과열’이라며 가상화폐 열풍을 우려해온 것도 사실이고요.

참고로 한은은 공식적으로 가상통화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언론이나 시장에선 가상화폐나 암호화폐라는 용어를 주로 사용합니다. 미묘하지만 약간의 상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가상화폐는 실물이 없이 네트워크로 연결된 가상공간에서 사용하는 전자화폐를 의미합니다. 정부나 한은은 화폐라는 용어가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돈’의 개념이 강한 탓에 화폐가 아닌 통화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고요. 제도권의 지급수단으로 인정할 수 없어 화폐 대신 통화라는 용어를 선택한 측면도 있습니다.

이날 통화정책방행 설명회를 본 한 금융권 관계자는 “통화정책방향 설명회가 아니라 무슨 가상화폐 청문회 같았다”는 평을 하기도 했답니다.(끝)/kej@hankyung.com

오늘의 신문 - 2024.05.03(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