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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공간의 정체성을 살리는 ‘공간 업사이클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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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은 한경비즈니스 기자) 재활용을 넘어 ‘새활용’이 주목받는 시대다. ‘업사이클(up-cycle)’이라고 불리는 새활용은 재활용(리사이클)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개념이다.

단순히 쓰레기를 재활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버려진 물건을 전혀 새로운 용도로 사용할 수 있다. 최근 지속 가능한 패션이 화두가 된 패션업계를 필두로 새활용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폐방수천이나 현수막 등을 이용해 가방이나 지갑 등을 만드는 브랜드가 늘어났고 서울시에서는 9월 국내 업사이클 브랜드를 모아 놓은 ‘새활용플라자’를 개관했다.

새활용은 비단 소모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옛 공간의 정체성을 살리면서 새로운 공간으로 탄생시키는 ‘재생건축(공간 업사이클링)’도 도시재생이라는 거대한 흐름과 맞물려 주목받고 있다.

단순히 낡은 건물을 보수하는 것이 아니라 장소에 머물렀던 역사와 이야기가 새로운 가치로 탄생하는 것이 재생건축의 핵심이다.

◆유럽에서 시작된 공간 업사이클링

유럽은 1990년대부터 재생건축에 대해 고민해 왔다. 화력발전소 건물을 개조해 2000년 개관한 영국 런던 테이트모던미술관은 재생건축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다.

제철공장을 개조해 1997년 개장된 독일 뒤스부르크 환경공원은 용광로가 사람들의 휴식 공간으로 변하고 가스 저장 탱크는 다이빙센터로 변했다.

건물 곳곳이 레저 시설로 변하면서 1980년대 대표적인 산업단지가 유럽에서 가장 모범적인 친환경 도시로 탈바꿈했다.

탄광 일대를 박물관·도서관 등 문화 공간으로 바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오른 독일 에센의 졸페라인, 폐기된 고가철도를 공원으로 만들어 2009년 개장된 미국 뉴욕의 하이라인파크 등도 재생건축의 성공 모델로 손꼽힌다.

호텔도 호화로운 건물 대신 과거 다른 용도로 쓰였던 건물을 활용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호텔 공급이 많아지면서 오히려 옛 장소를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요소는 소비자들에게 신선한 ‘콘셉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가 묵는 곳이 과거 감옥이었거나 우체국이었다고 생각하면 풀빌라가 딸린 럭셔리 호텔만큼이나 매력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핀란드 헬싱키에 있는 호텔 카타야노카는 1837년에 세워진 감옥을 개조해 2005년 오픈했다. 한눈에 봐도 교도소 건물로 보이는 붉은 벽돌의 건물 외관과 벽면은 정부에서 역사적 가치를 인정해 보존하고 있다.

호텔 내부 복도 시설 등 기본적인 골격은 옛 모습 그대로 유지돼 있는 반면 106개의 객실은 투숙객의 편의를 위해 모던한 인테리어로 꾸몄다. 호텔 직원들은 검정색과 흰색 스트라이프 무늬에 수인 번호가 적힌 옷을 입고 투숙객들을 맞이해 재미를 더한다.

투숙객들도 개별 요청하면 해당 죄수복을 입고 파티를 즐길 수도 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자리한 로이드호텔 & 컬처럴 엠버시도 과거 유대인들의 피난처이자 감옥을 호텔로 개조해 독특한 경험을 선사한다.

폐공장을 개조한 호텔도 있다. 상하이에 자리한 워터하우스호텔은 언뜻 보면 호텔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외관을 가지고 있다. 과거 폐공장 외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허름한 창고 같지만 5성급 호텔이다. 내부까지 노출 콘크리트를 사용했지만 세련된 디자인의 가구로 꾸몄다.

한국에서도 몇 년 전부터 재생건축에 대한 열기가 뜨겁다. 종로구 계동의 동네 목욕탕인 ‘중앙탕’은 2015년 안경류 브랜드 젠틀몬스터 쇼룸으로 바뀌었다.

당시 홍대 입구·신사동·논현동에 매장을 보유하고 있던 젠틀몬스터는 넷째 매장으로 감성적 이미지를 가진 공간을 찾던 중 여기에 매장을 꾸렸다. 목욕탕의 원형을 보존하기 위해 보일러실·사우나실·욕탕 등 목욕탕의 구조를 그대로 살렸다.

목욕탕 특유의 청색 타일과 콘크리트가 노출된 벽면에 선반을 설치해 제품을 전시했다. 콘셉트를 확실히 하기 위해 목욕탕 물을 데우는 실린더에서 영감을 얻어 ‘타임 트랜스포메이션’이라는 작품도 설치했다. 단순히 안경을 쇼핑하러 오는 곳이 아니라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는 복합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1930년대 예술가들의 쉼터였던 종로구 통의동의 ‘보안여관’도 2010년 갤러리로 재탄생했다. 여관일 때도 서정주·김동리·김달진 등 문인들이 문예 동인지 ‘시인부락’을 창간한 장소였다. 화가 이중섭과 시인 이상도 보안여관 문지방이 닳도록 들락거렸다.

갤러리로 바꾸면서 최소한의 리모델링만 거쳐 1930년대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상상해 볼 수 있다. 부산시에도 폐공장이 복합 문화 공간으로 변한 사례가 있다. 고려제강의 옛 공장을 이용해 만든 ‘F1963’이 그 주인공이다.

원래 이곳은 45년 동안 와이어로프를 생산했다. 하지만 2008년 생산 시설을 이전하면서 사실상 버려진 공간이었다. 2016년 부산시와 고려제강은 이 폐공장을 부산비엔날레 전시장으로 활용하며 문화 공간으로서의 가능성을 봤고 총 67억원을 들여 ‘F1963’을 조성했다.

대형 공장 부지인 만큼 거대한 면적의 전시장과 카페, 중고 서점, 펍과 가드닝 숍 등이 자리 잡고 있어 부산 ‘핫플레이스’로 거듭났다. (끝) / kye0218@hankyung.com (출처 한경비즈니스 제114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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