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과 문화의 모자이크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보스나(Bosna)강이 흐르는 보스니아 지역과 네테르바(Neterva)강이 흐르는 헤르체고비나 지역, 그리고 세르비아인들이 모여 사는 스릅스카공화국까지 나란히 붙어 1국가 2체제를 이룬다. 현재나 과거나 복잡하기는 마찬가지다.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통로라는 이유로 수많은 전쟁을 치러야 했다. 로마제국, 보스니아 왕국, 오스만튀르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차례로 보스니아를 거쳐갔다. 복잡한 역사는 다양한 문화를 잉태했다. 사람들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두고 ‘민족과 문화의 모자이크’라고 정의한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라는 이름이 귀에 익기 시작한 것은 1991년 발발한 보스니아 내전 때부터다. 보스니아에 살고 있던 세르비아 사람들은 유고로부터 독립하려는 크로아티아, 무슬림 이웃들에게 총구를 겨눴다. 함께 축제를 즐기고, 커피를 마시며 일상을 공유하던 이웃들이 적으로 돌변한 가슴 아픈 싸움은 20세기 마지막 전쟁이 됐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제1차 세계대전의 포문을 연 곳이기도 하다. 이곳이 세르비아 왕국의 일부였던 시절의 일이다. 민족주의에 경도된 세르비아계 청년이 사라예보에 방문한 오스트리아 대공 부부를 암살했다. 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 왕국을 침공하면서 시작된 세계 1차대전의 빌미가 됐다. 수도 사라예보의 이름을 딴 사라예보 사건의 현장 곁 건물은 고스란히 남아 당시 이야기를 전하는 박물관이 됐다.
가슴 아픈 전쟁의 흔적은 곳곳에 남아 사람들의 발길을 붙든다. 사라예보 남쪽, 코토라츠 지역에는 ‘희망의 터널’이 있다. 내전 당시 세르비아 사람들은 사라예보를 감싸고 있는 4개의 산에 진을 쳤다. 한눈에 보이는 낮은 구릉에 자리 잡은 도심에 포탄을 퍼부었다.
도심에 살던 사람들은 물리적, 심리적으로 고립됐다. 공격이 격해질수록 공포는 깊어졌다. 살아남기 위해 땅굴을 파기 시작했다. 포위망을 간신히 비켜난 가정집 지하에 길을 내고 살길을 모색했다.
높이 1.6m, 길이 800m의 좁은 길. 여자와 노약자에게는 탈출의 길, 고향을 지키려는 남자들에게는 음식, 무기, 구호물자 등이 유입되는 희망의 길이 됐다. 전쟁이 끝나고 터널을 숨긴 가정집은 박물관의 모습을 갖췄다. 박물관 입구의 포탄을 맞은 울퉁불퉁한 흔적은 붉게 물들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사람들은 포탄이 떨어진 자국을 붉게 칠하고 ‘사라예보의 장미’라고 부른다. 여행하는 내내 ‘사라예보의 장미’는 수없이 마주치게 된다. 바닥에 새겨진 붉은 장미 한 송이를 보며 사람들은 생각한다. ‘전쟁은 아프다. 다시는 없어야 할 일이다.’
교집합의 정수, 사라예보 구도심
밀야츠카 강 북쪽 구도심에서는 다양한 종교 건축물을 볼 수 있다. 세르비아 정교회, 오스트리아-헝가리 시절의 건축물들과 네오고딕 양식의 성당, 유대교 회당 등이 드문드문 보인다. 가장 많이 눈에 띄는 종교 건축물은 이슬람 사원이다. 오스만튀르크가 지배하던 시절 가장 급격한 발전을 이뤘고, 그 영향으로 아직까지 사라예보에는 이슬람 신자가 많다. 그래서인지 다양한 민족과 종교가 한데 모였지만, 이슬람 정취가 가장 짙다.
구시가지의 상징인 세빌리 샘(이 샘의 물을 마시면 사라예보를 다시 찾게 된다는 전설이 깃들었다) 주변으로 수많은 사원과 중앙 시장인 바슈카르지아, 모스크와 시계탑, 베지스탄(오스만 시대의 직물, 수공예품을 거래하는 대형 쇼핑몰) 등이 혈관처럼 뒤엉킨 골목 구석구석에 자리잡았다.
구시가지 중심에 자리 잡은 베지스탄은 이스탄불의 그래드바자를 작고 아담하게 압축해놓은 모양새다. 지붕 아래 일렬로 늘어선 상점에는 향신료, 먹거리, 의류, 액세서리, 기념품 등을 판매한다. 상점과 레스토랑이 도열한 골목 여기저기서 양고기 굽는 냄새, 터키식 커피, 물담배 향이 공기 중에 가득하다. 어디나 활기가 가득하지만 가장 번잡한 곳은 카잔질록 골목이다. 과거에는 구시가지 골목에 동종의 물건을 판매하는 상인들이 모여 길드를 조성했단다. 전쟁, 화재, 현대화 등을 거치면서 길드 골목들은 변화했고 지금은 카잔질록 골목만이 옛 모습 그대로다. 카잔질록을 우리말로 바꾸면 ‘냄비골목’이다. 구리로 만든 냄비와 그릇이 골목 가득한 풍경은 동화 속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다리(bridge)가 빛나는 마을, 모스타르
차를 타고 사라예보 서쪽으로 두 시간을 달렸다. 디나르 알프스 산맥이 펼쳐놓은 풍광에 취해 있으면 제아무리 구불구불한 산길이라도 멀미 나지 않는다. 도착한 곳은 헤르체고비나 지방의 아름다운 도시 모스타르다. 모스타르라는 이름은 다리의 파수꾼을 지칭하는 모스타리(mostari)에서 유래한다. 모스타리들이 지키던 다리는 ‘스타리 모스트’, 오래된 다리라는 뜻이다.
모스타르는 15세기 오스만튀르크가 점령하면서 발전한 도시다. 아드리아해를 건너온 오스만튀르크는 모스타르를 보스니아 중앙으로 가기 위한 거점으로 삼고 1522년부터 도심을 요새화하기 시작했다.
발칸 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슬람 건축물로 평가 받는 석재다리, 스타리모스트도 이 시기에 놓였다. 다리가 놓인 네레트바강 한쪽에는 사원 등이 우후죽순 생겨났고 사람들은 공공건물들을 중심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1878년 오스만튀르크를 물리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모스타르의 새로운 주인이 됐다. 이슬람 건축물들이 많은 쪽에 비해 상대적으로 빈 땅이 많은 강 반대편에 시설들을 건축하기 시작했다. 가톨릭 성당, 신 고전주의 양식의 극장, 주거지역이 차례로 들어섰다.
1993년 모스타르는 내전의 격전지였다. 다른 문화, 종교 화합의 상징이 됐던 다리는 민족 간의 분쟁으로 처참히 무너졌다. 파괴된 다리는 2004년부터 복원되기 시작했다. 네레트바 강둑과 바닥을 뒤져 잔해를 모았고, 메우지 못한 부분은 새 돌을 끼워 넣었다. 2005년 옛 모습을 되찾은 다리는 민족 간의 분쟁, 동서양의 문화 차이, 다른 종교와 이념을 화합하는 평화의 상징이 됐다. 같은 해, 다리는 구시가지와 더불어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후 관광지의 면모를 갖췄다. 상점, 커피숍, 레스토랑 등이 구시가지 곳곳에 자리잡았다. 크로아티아 근거리에 위치해 사라예보는 못 가봤어도 모스타르는 가봤다는 사람들도 꽤 많다.
수백년의 시간 동안 수많은 사람이 걸었던 돌길은 반질반질 윤이 난다. 나무가 무성한 강변을 따라 걷는 것도, 미로처럼 얽힌 골목 구석구석을 둘러보는 것도 모두 즐겁다. 다리 위에 올라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 이슬람의 정취를 만끽하거나,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유럽에 온 듯한 착각에 빠져도 좋겠다. 다리는 밤낮없이 아름답다. 고지대에서 내려다봐도, 강둑에서 올려다봐도 제각각 다른 색감과 형태로 우아하고 기품 있는 매력을 발산한다.
다리 위에는 아직까지 모스타리들이 있다. 옛 시절엔 다리 위에서 적의 동태를 감시했지만, 지금의 모스타리들은 생업을 위해 다리 아래로 뛰어내린다. 시간이 정해진 건 아니다. 관광객들이 십시일반 25유로를 걷어 모스타리에게 건네면 24m 높이에서 거침없이 뛰어내린다. 별똥별이 떨어지듯 찬란하게 빛나는 네테르바 강물로 순식간에 훅하고 사라진다. 잠시의 정적을 깨고 모스타리가 강둑으로 올라오면 사람들은 휘파람을 불고 손뼉을 치며 환호한다.
우연히 마주친 그 광경이 미안하고 안쓰러웠다. 온몸에서 강물을 뚝뚝 눈물처럼 떨구는 그에게 5유로를 건넸다. 그의 눈빛 너머, 그의 젖은 머리를 둥그렇게 감싸 안은 듯한 모스스타르 다리가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다. 언제나 모스타르를 생각하면 그 장면이 가장 먼저 떠오를 만큼.
여행정보
보스니아로 가는 직항은 없다. 터키 이스탄불이나 유럽 주요 도시로 가는 직항을 이용한 후 경유해야 한다. 이스탄불에선 비행기로 한 시간 거리다. 화폐는 마르카(MARKA)를 사용한다. 1마르카는 약 650원이다. 시차는 한국보다 8시간 느리다. 사라예보의 도심은 모스타르에 비해 치안이 불안정하다. 대중교통을 탈 때나 외진 곳으로 혼자 움직일 때는 소매치기를 조심해야 한다. 사라예보는 모스타르에 비해 무슬림들이 많이 거주한다. 때문에 대부분 식당에서는 돼지고기를 판매하지 않는다. 바슈카르지아 구시가지에는 양고기와 소고기를 다양한 형태로 조리해 구워주는 집들이 밀집해있다. 다진 고기를 손가락 크기로 돌돌 말아 구워 먹는, 체바치치(Chebabchichi)가 인기 메뉴다.
보스니아 사라예보·모스타르=여행작가 문유선 hellomygrape@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