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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량한 붉은 사막에 우뚝 선 돌기둥·기묘한 협곡…정말로 자연이 빚은 조각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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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라 작가의 좌충우돌 미국 여행기 (1) 모뉴먼트 밸리 나바호 부족공원

유타·애리조나주 경계에 위치…'나바호족' 인디언 부족의 성지
서부영화에서 자주보던 그 곳…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배경
시시각각 바뀌는 풍경 '황홀'

300m 수직 절벽 밑 말발굽 협곡 '홀스슈 벤드'는 신이 빚은 작품
빗물이 만든 협곡 '앤틸로프 캐니언', 빛의 마법에 홀린 듯 신비감 자아내

미국 애리조나와 유타, 뉴멕시코 주에 걸쳐 있는 나바호의 땅을 여행한다는 것은 이 거대하고도 황량한 땅의 오랜 역사를 들여다보는 일이다. 붉은 사막 위 요새처럼 솟은 바위들, 수만 년간 메마른 땅을 정교하게 조각한 거대한 강줄기, 지구의 결이 고스란히 새겨진 협곡까지. 미국 속에 감춰져 있던 순수한 땅, 그리고 그 땅과 꼭 닮은 사람들을 만나고 왔다.



나바호 부족의 신성한 땅

미 서부의 광활한 대지를 끊임없이 달린다. 완만한 언덕을 두어 번 넘자 메마른 잡초가 무성하던 땅은 어느새 붉은 사암이 지배하는 세계로 바뀌었다. 옆을 지나쳐가는 자동차들의 바퀴가 하나같이 흙모래투성이다. 카옌타라는 마을에 도착했다. 신호에 걸린 낡은 포드 트럭 뒤에 인디언 꼬마 다섯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다. 아이들의 친근한 생김새를 보니 나바호 인디언 구역에 들어와 있다는 것이 비로소 실감 난다. 마을을 지나 더 깊숙한 곳을 향해 달린다. 문명은 금세 사라지고 사방은 또다시 아득한 대지뿐이다. 머지않아 거인처럼 불쑥 솟아오른 바위들이 신기루처럼 나타난다. 나바호족의 가장 성스러운 땅, 모뉴먼트 밸리(Monument Valley)에 도착했다.

매표소를 지나 곧바로 더뷰호텔로 직행한다. 모뉴먼트 밸리 내부의 유일한 호텔이자, 가장 대표적인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기 때문이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모뉴먼트 밸리의 풍경은 그다지 낯설지 않다. 수많은 고전 서부영화 속에서 챙이 넓은 스테트슨(stetson) 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허리춤에 권총을 찬 카우보이들이 먼지를 풀풀 날리며 이곳을 내달렸다. 포레스트 검프에서는 톰 행크스가 이곳에서 별안간 달리기를 멈추고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했다. 스크린 속에서 수없이 봐온 풍경이니 실제로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전망대에서 마주한 모뉴먼트 밸리를 보자 그간 상상했던 모든 이미지는 사라져버렸다. 눈앞에 펼쳐진 끝없는 붉은 대지, 그 위로 장엄하게 서 있는 바위들은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풍경이었다.

대지에 묻힌 아픈 역사를 엿보다

모뉴먼트 밸리의 정식 명칭은 모뉴먼트 밸리 나바호 부족 공원이다. 미 남서부 유타와 애리조나, 뉴멕시코주 경계에 걸쳐 있다. 여행자들이 방문하는 대부분 지역은 애리조나에 있지만 큰 상관은 없다. 어느 주에 있느냐가 아니라 나바호 자치구역에 있다는 게 중요한 것이므로. 미국은 본래 아메리카 인디언이라 불리는 원주민의 땅이었다. 수만 년 전부터 다양한 부족의 원주민이 이 거대한 대륙을 보듬으며 살아왔다. 이들의 역사가 바뀐 것은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발을 디디면서부터다. 유럽의 백인들이 동부 해안에 닻을 내렸고 그들은 곧이어 황금을 좇아 총을 들고 서부로 몰려 들어왔다. 개척이라는 이름 아래 이 땅의 주인이던 원주민은 모든 것을 잃기 시작했다. 미합중국과 인디언 부족 간 맺은 평화조약이 하나둘 어겨졌고 1860년대에는 원주민 섬멸작전이 자행됐다. 나바호족도 예외는 아니었다.

치열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1863년 나바호족은 560㎞ 떨어진 뉴멕시코주 보스크 레돈도로 강제 유배를 당했다. 잡초 하나 자라나기 힘든 척박한 땅에서 그들은 온갖 핍박을 견뎌냈다. 그로부터 5년, 당시 미합중국의 대표이던 셔먼 장군과 평화협정을 맺은 뒤 나바호족은 비로소 고향 땅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게 됐다. 좋은 땅은 이미 백인이 차지했고, 수많은 부족원이 목숨을 잃은 뒤였다. 그래도 고향에 다시 돌아올 수 있음에 감사했고 땅에 입을 맞추며 기뻐했다. 그들이 다시 찾은 땅이 바로 모뉴먼트 밸리가 속한 ‘나바호 인디언 보호구역’이다. 미국 곳곳에 흩어진 310개의 인디언 보호구역 중 규모가 가장 크다. 본래 이 땅의 주인이던 원주민을 ‘보호’한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나바호족은 ‘보호구역’이라는 말 대신 나바호 자치구(Navajo Nation)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언어도 나바호어를 쓰고 국기도 있으며 대통령도 뽑는다. 그들의 뿌리를 지켜내고 있는 것이다.

풍경 속으로 가려면, 17마일 밸리 루프 드라이브



모뉴먼트 밸리를 제대로 보고 싶다면 그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 공원 내부에 밸리 일부를 탐방할 수 있는 드라이브 코스가 조성돼 있다. 개인적으로 돌아볼 수도 있고 나바호족이 운영하는 가이드 투어에 참여할 수도 있다. 17마일(약 27㎞)에 불과하지만 비포장도로인 탓에 다 돌아보려면 꽤 많은 시간이 걸린다. 모뉴먼트 밸리는 원래 사암으로 이뤄진 고원지대였다. 평평했던 땅은 기나긴 세월 동안 바람과 비의 침식, 풍화작용으로 부서져 내렸다. 모뉴먼트 밸리의 바위들은 땅에서 융기한 것이 아니라 깎여 만들어진 셈이다. 넓고 평평한 바위는 메사(Mesa), 뾰족한 바위는 뷰트(Butte)라 부른다. 덜컹덜컹 대며 해발 2000m의 황무지에 진입한다. 모뉴먼트 밸리의 상징 격인 두 개의 벙어리장갑 뷰트(West and East Mitten Buttes)와 메릭 뷰트(Merrick Butte)가 어느새 코앞에 있다. 각기 다른 생김새에 따라 이름 붙여진 코끼리 바위, 세 자매 바위, 엄지 바위 등을 찾아다니는 재미가 쏠쏠하다. 밸리에서 가장 높은 돌기둥인 토템 폴(Totem Pole)도 빼놓을 수 없다. 곳곳에는 모뉴먼트 밸리를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는 포인트가 있다. 서부영화에 자주 등장한 존 포드나 아티스트가 대표적이다. 아티스트 포인트로 올라가 모뉴먼트를 조망하기로 한다. 전망대 한쪽에는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나바호인이 전통 음악을 틀어놓은 채 모뉴먼트 밸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마치 붉은 깃털을 머리에 꽂은 나바호족이 대지를 호령하던 그 옛날로 돌아간 것만 같다.

모뉴먼트 밸리 안에서 보내는 하룻밤

모뉴먼트 밸리를 찾는 대부분 여행객이 전망대 풍경만 쓱 보고 돌아간다. 그러나 여유가 있다면 하룻밤 정도는 머물러보는 것이 좋다. 뷰호텔 발코니에 서니 모뉴먼트 밸리의 아름다운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한 편의 영화 같던 석양이 지고 어둠이 깔린다. 밤하늘의 수많은 별이 대지와 바위 위로 쏟아져 내린다. 자꾸만 보고 싶은 마음에 잠을 설치다 보면 어느덧 지평선에서는 또 다른 해가 뜬다. 붉은 사막에 빛이 드리워지고 바위들은 시시각각 옷을 갈아입는다. 가슴이 벅차오른다. 경이를 넘어 이상하기까지 한 광경이다.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을 보는 듯하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강한 기운이 대지 온 곳에 스며있다. 왜 이곳이 나바호족의 신성한 땅이 됐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모뉴먼트 밸리를 떠나기 전 우연히 나바호족 할아버지와 대화를 나누게 됐다. 어디서 왔느냐, 어디로 가느냐 등의 시시콜콜한 인사였다. 그의 얼굴을 가만히 살펴보니 피부는 구릿빛이 돌고, 눈가에는 오래된 나무의 결과 같은 주름이 깊게 패었다. 손은 투박하지만 바위처럼 두툼하고 단단하다. 그러고 보니 나바호족 사람은 그들의 터전인 이 붉고 아름다운 땅과 많이 닮았다.

수렵과 식물채집으로 자연과 함께 살아가던 이들이 이제는 기념품과 관광 상품을 팔며 생계를 유지한다. 외압과 폭력으로 점철된 세월의 풍파에 그들의 삶은 많이 변했지만, 땅은 변하지 않았다. 물론 이 땅에 대한 그들의 애정과 긍지 또한 변하지 않았을 테다. 여행에서 돌아온 지금도 붉은 땅 어딘가에서 나바호의 구슬픈 피리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오는 듯하다.

콜로라도 강의 또 다른 걸작 ‘홀스슈 벤드’



모뉴먼트 밸리에서 차로 2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페이지라는 도시가 있다. 인구 7000명 정도의 작은 마을이지만, 미 서부를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르는 관광도시다. 나바호 땅의 또 다른 보물인 앤틸로프 캐니언(Antelope Canyon)으로 가는 길목이자, 홀스슈 벤드(Horseshoe Bend), 글렌 캐니언(Glen Canyon), 내추럴 브리지(Natural Bridge)와 같은 멋진 자연유산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동이 트기 전 부지런히 홀스슈 벤드로 향한다. 차를 세우고 황무지를 향해 무작정 걷기 시작한다. 숨이 차오르고 이곳으로 가는 것이 맞나 싶을 때쯤 저 멀리 절벽의 시작점이 보인다. 한 발짝 두 발짝 절벽 끝에 다다르자 엄청난 풍경이 시선을 압도한다. 깊이만 300m에 달하는 수직 절벽 아래 펼쳐진 편자 모양의 협곡을 신비로운 빛깔의 강물이 부드럽게 감싸 흐른다. 홀스슈 벤드는 그랜드 캐니언을 조각한 콜로라도 강이 만들어낸 또 다른 작품이다. 이 거대한 강줄기는 수만 년간 굽이치며 말발굽 모양의 협곡을 완벽하게 조각했다.

홀스슈 벤드의 가장 아름다운 때는 일출과 일몰이다.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제대로 일출을 감상하기로 한다. 별다른 안전장치가 없어 절벽 주위를 걸을 때는 특히 조심해야 한다. 언제든지 무너져 내릴 수 있다는 경고문을 가볍게 여겼다간 큰코다친다. 해가 한 뼘씩 차오를 때마다 마법이 펼쳐진다. 협곡 중앙의 붉고 짙었던 바위는 오렌지색과 핑크빛을 띠고 강물은 에메랄드빛으로 반짝인다. 거대한 원형극장에 홀로 앉아 세상 모든 호사를 누리는 기분이다.

물과 빛, 시간이 빚어낸 궁극의 예술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앤틸로프 캐니언으로 향한다. 개인적인 투어는 불가능하고, 오직 나바호족이 운영하는 투어 프로그램을 이용해야만 볼 수 있다. 앤틸로프 캐니언은 우리가 상상하는 일반적인 협곡과는 조금 다르다. 사암 고원에 생긴 균열에 빗물이 흘러들어 만들어진 좁다란 계곡, 즉 슬롯 캐니언이다. 어퍼 캐니언(Upper Canyon)과 로어 캐니언(Lower Canyon) 두 군데로 나뉘어 있다. 나바호족 가이드와 함께 지프를 타고 오프로드를 거침없이 내달린다. 의자에 엉덩방아를 수십 번은 찍은 뒤에야 어퍼 앤틸로프 캐니언 입구에 도착했다. 좁다란 입구를 보니 새삼 앤틸로프란 이름의 의미가 떠오른다.



앤틸로프란 우리말로 하면 사슴과 동물인 영양인데, 좁은 협곡 사이를 영양들이 지나다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놀라움에 입을 틀어막고 말았다. 마치 지구의 피부 속으로 들어온 듯한 광경이다. 물이 지나간 자리는 도자기 결처럼 섬세하고, 벽면은 좁아졌다 넓어지기를 반복하며 파도처럼 일렁인다. 앤틸로프 캐니언은 빛의 예술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장소기도 하다. 들어오는 빛의 양에 따라 붉은 벽면은 보라색이 되기도 하고 파란색으로 보이기도 한다. 절정은 천장의 좁은 틈새에서 빛줄기가 핀 조명처럼 툭 하고 떨어질 때다. 3월 말부터 9월까지만 볼 수 있고, 시간대를 잘 맞춰야만 만날 수 있다. 골짜기 어디를 둘러보아도 같은 풍경이 없다. 인간은 감히 흉내 낼 수조차 없는 정교하고 고귀한 자연의 조각품이다.

여행정보

모뉴먼트 밸리는 나바호 부족 공원에 속해 있어 미국 국립공원 패스가 있더라도 따로 입장료(4인 기준 20달러)를 내야 한다. 나바호 부족이 운영하는 더밸리뷰호텔에 방문자 센터, 레스토랑, 박물관 등이 모여 있다. 이곳에서 숙박할 예정이라면 웹사이트를 통해 예약하는 것이 좋다. 앤틸로프 캐니언은 나바호족이 운영하는 투어 프로그램을 이용해야만 방문할 수 있다. 인근 마을인 페이지에 여러 개 업체가 있으며 여행 전 예약해두는 것이 좋다. 어퍼 캐니언을 방문할 예정이라면 앤틸로프 캐니언 투어를 추천한다. 투어는 보통 일반투어와 사진투어로 나뉘어 있다. 전문적인 장비를 가지고 사진을 찍을 계획이라면 사람이라면 사진투어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모뉴먼트=글·사진 고아라 여행작가 minstok@naver.com



고아라 여행작가는=사진작가이자 여행작가. 세계를 유랑하는 편식 없는 여행가다. 자신만의 시선이 담긴 사진과 글로 여행을 담아내고, 이를 다른 이와 함께 나누는 것에서 행복을 느낀다. 지은 책으로는 《그리스 홀리데이》(꿈의지도)가 있으며 여행 잡지, 신문 등 여러 매체에 여행기를 기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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