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프(off) 대학로의 중심’이자 ‘소극장 연극의 메카’로 불려온 게릴라극장이 이날 마지막 공연을 올렸습니다. 2004년 서울 동숭동의 한 건물 지하에 처음 만들어진 게릴라극장은 2006년 대학로 중심가에서 떨어져있다는 의미에서 ‘오프 대학로’로 불린 혜화동로터리 부근 골목으로 옮겨왔습니다. 1986년 부산에서 창단해 밀양, 김해, 부산 등에서 주로 활동하던 극단 연희단거리패가 처음으로 서울에 마련한 활동공간이었습니다. 게릴라극장은 지난 10여년 간 연희단거리패 작품을 비롯해 160여 편의 작품을 무대에 올렸습니다. 수많은 젊은 연출가와 극작가들의 등용문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정부 지원금이 끊기는 등 운영에 어려움을 겪다 결국 문을 닫게 됐습니다.
연희단거리패가 폐관공연 작품으로 선택한 ‘황혼’은 작년 11월 게릴라극장에서 국내 초연된 작품입니다. 오스트리아 극작가 페터 투리니의 원작으로, 알프스 산속에 혼자 살면서 관광객들에게 산짐승 울음소리를 흉내내주는 대가로 관광청에서 돈을 받아 살아가는 70대 맹인에게 볼품없는 모습의 50대 창녀가 찾아오며 벌어지는 일을 그립니다. 연희단거리패 관계자는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으면서 천연덕스럽게 삶의 잔인함을 얘기하고, 깊고 솔직하게 존재의 밑바닥을 드러내면서도 격조를 잃지 않아 게릴라극장 폐관 공연에 어울린다”고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마지막 ‘황혼’은 뜨거웠습니다. 배우들의 열연은 단출한 공간을 압도했습니다. 조명은 장식적 효과와는 거리가 멀고, 배우들을 비추는 역할에 충실했습니다. 무대는 그저 주인공인 70대 맹인 노인이 혼자 사는 초라한 방 한 칸을 구현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허전하다는 느낌은 조금도 들지 않습니다. 김소희·명계남·안윤철 세 배우의 폭발적인 연기력이 관객의 피부까지 진동시켰습니다.
공연이 끝나고 30여분 뒤, 이윤택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이 폐관식 진행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백발의 그는 색이 조금 바랜 쪽빛 셔츠에 짙은 회색의 양복(그것은 ‘정장’이란 말보다 ‘양복’으로 칭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을 줬습니다)을 입고 흰색 스니커즈를 신고 있었습니다. ‘무대 위’를 주 무대로 하는 배우들과 달리 감독인 자신은 ‘무대 아래’를 제자리로 생각하는 듯, 그는 무대 단상 위에 올라가지 않고 바닥에 서서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연희단거리패는 이제 명륜동 30(삼공)스튜디오에서 작업을 이어갑니다. 여기 게릴라극장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인데, 땅값이 여기의 절반밖에 안 돼요. 옛날에 불이 났었다고 해서 지금 굿을 열심히 하고 있어요.” 자금난에 10여년을 지켜온 둥지를 옮겨가지만 그는 해학이 넘쳤습니다.
연희단거리패는 새 공연장에 ‘게릴라극장’이라는 이름을 가져가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 감독이 그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이제 그 어떤 전제된 성격이나 개념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합니다. 개성과 다양성이 넘치는 소극장 연극시대를 열겠다는 취지입니다.” ‘게릴라’란 적의 배후나 측면을 기습해 적을 교란하고 파괴하는 소규모 비정규 부대나 그 부대에 속하는 전투원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 단어가 주는 특유의 느낌과 그것이 연극계에 주는 게릴라극장에 대한 전제를 그는 허물고 싶어했습니다.
이들이 새로운 실험을 할 30스튜디오는 연극인들이 숙식과 공연을 모두 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지하엔 남자 숙소, 2층엔 여자 숙소를 갖췄습니다. 극장과 함께 마당과 카페도 만들었습니다. 이 감독은 “자본이 지배하는 시대에 갈수록 연극하기가 힘들어진다”며 “지원금을 한 푼도 못 받더라도 연극을 할 수 있는 법을 고민했다”고 했습니다. 그가 찾은 답은 ‘자가발전 시스템’이라고 합니다.
“먹고, 자고, 연습하고, 공연하는 게 연극인의 전부입니다. 30스튜디오는 그 모든 걸 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그것만으론 필요한 돈이 안 모일 수도 있으니 커피도 팔고 책도 팔 거예요. 30스튜디오 이름을 ‘아지트’라고 지을 생각도 했었습니다. 30스튜디오가 연극의 최저 생존 능력을 갖춘 난공불락의 아지트가 되기를 꿈꿉니다.”
이날 폐관식엔 문화체육관광부 관계자,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오른 사람들, ‘부역자’로 불리는 연극 관계자 등이 모두 모였습니다. 이 감독은 “정치가 사람을 우습게 만든 시대”라며 “연극에 대한 애정과 능력을 갖춘 연극인들이 정치적 이유때문에 큰 상처를 입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정치적으로 모든 게 다 갈갈이 찢긴 지금, 우리는 찢기지 않았다는 걸 이 자리가 보여준다”고 이날 자리의 의미를 평가했습니다.
‘황혼’이 게릴라극장에서의 처음이자 마지막 작품이라는 배우 명계남은 “연극계가 사랑하는 게릴라극장의 마지막 공연에 이름을 올려 기쁘다”며 “이 양반(이윤택 예술감독을 가리킵니다)이 살아있는 한 계속 쫓아다니며 연기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김소희 대표는 “게릴라극장 폐관에 안타까워하는 분들이 많다”며 “사랑하는 관객이 이렇게나 많은데 게릴라극장만큼 행복한 극장이 또 있을까 싶다”고 했습니다. 그는 “게릴라극장을 만들 때 연희단거리패가 창단 20주년이었는데, 이제 극단이 나이로 30살이 됐다”며 “앞으로는 30스튜디오에서 30대가 할 수 있는 연극을 선보이겠다”고 밝혔습니다.
연희단거리패는 오는 21일부터 다음달 7일까지 30스튜디오에서 이윤택이 대본을 쓰고, 연출한 ‘초혼’을 공연합니다.(끝)/ loo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