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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권에 때아닌 '운동장 공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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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정 금융부 기자) 금융권에 때아닌 ‘운동장 공방’이 일고 있습니다. 농구장, 축구장, 기울어진 운동장에 종합 운동장까지 갖가지 운동장이 등장하고 있는데요. 사연의 시작은 보름 전으로 거슬러올라갑니다.

운동장 공방의 포문을 연 건 황영기 금융투자협회장입니다. 이달 6일 취임 2주년 기자간담회 자리에서 황 회장은 작심한 듯 “국내 증권회사들은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뛰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은행 등 다른 금융업권에 비해 금융투자업권에 적용되는 금융 규제가 불공평해 영업 환경이 불리하다는 얘기를 기울어진 운동장에 비유한 겁니다. 특히 국내 금융업 정책이 은행에 지나치게 유리하게 설계돼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황 회장은 “금융투자업권에만 불리하게 작용하는 금융 규제를 적극 철폐해야 한다”면서 “자유롭게 외환을 거래하고 법인을 대상으로 한 지급결제 업무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래야 골드만삭스 같은 세계적인 투자은행(IB)이 나올 수 있다는 논리였습니다.

금융위원회를 중심으로 논의되고 있는 신탁업법 독립 문제에 대해선 반대의 뜻을 분명히 했습니다. 금융당국은 자본시장법(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에서 신탁업법 분리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황 회장은 “이렇게 되면 은행이 결국 자산운용업으로 진출하게 된다”며 “은행이 별도의 라이선스를 둘 만큼 고도의 전문성을 요구하는 자산운용업의 고유 업무를 노리는 것은 업권 이기주의”라고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은행이 수익성이 떨어지니깐 신탁업을 통해 자산운용업에 진출하려는 것이라는 강도 높은 얘기까지 꺼냈습니다.

보름 뒤인 이달 20일. 하영구 전국은행연합회장은 기자간담회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칼을 뽑았습니다. 황 회장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한 것입니다. 황 회장이 언급한 ‘기울어진 운동장’에 대해 “은행은 축구장에서 축구를, 증권회사는 농구장에서 농구를 하라는 게 전업주의인데 증권회사가 법인지급결제 허용을 요구하는 건 농구팀이 농구장에서 축구를 하겠다면서 우리는 손을 잘 쓰니깐 축구할 때 손발 다 쓰겠다고 말하는 셈”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금융업권간 논란을 없애려면 아예 종합 운동장을 만들어 무한 경쟁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지금처럼 금융업권별로 업무가 다른 전업주의가 아니라 겸업주의로 가야 한다는 말이었습니다.

또 증권회사의 법인지급결제 허용 주장에 대해선 ‘관치 금융’을 조장하는 행태라는 의견도 나타냈습니다. 법인지급결제 허용에 대한 의사결정은 금융결제원 이사회에서 이뤄져야 하는데, 금융당국에 증권업계가 재차 허용을 요구하고 있다는 이유에섭니다. 증권회사 25곳은 2009년 금융결제원에 3300억원가량을 내고 지급결제망에 참여했습니다. 하지만 현재는 개인에 대한 지급결제만 허용되고 법인결제는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하지만 금융업권 ‘맏형’이라는 타이틀을 의식해서인지 금융투자업권에 대한 맹목적인 비난은 피하려는 모습이었습니다. 하 회장은 “이렇게 각 업권이 목소리를 내고 있는 건 어찌 보면 금융권 전체에 퍼진 위기의식 때문이다. 하루가 달리 영업 환경이 변하고 있다 보니 기존 사업을 지켜내고, 새로운 사업 모델을 발굴해 파이를 키워야 한다는 절박함이 깔려 있다”고 말하더라고요.

은행권과 금융투자업권간 의견 충돌이 혹여 소비자들에게 ‘밥 그릇 싸움’으로 비쳐질 것도 우려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결국 금융회사들이 더 다양한 업무를 취급하고 동일한 공간에서 서로 경쟁을 하게 되면 소비자들의 선택권은 확대되고, 싸고 질 좋은 금융상품들이 나오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검투사(글래디에이터)’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진 황 회장과 ‘직업이 은행장’으로 불리는 하 회장의 이같은 첨예한 대립을 금융권 안팎 관계자들은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 회장과 황 회장은 서울대 무역학과 선후배 사이로 각각 협회장을 맡기 전까지는 사석에서 자주 만나며 다양한 의견을 교류해왔다고 합니다. 하 회장이 1953년생으로 황 회장보다 나이와 학번이 1년 후배랍니다.

하지만 각각 협회장에 취임한 뒤로는 번번이 맞부딪히고 있습니다. 신탁업법, 법인지급결제 이슈 이전에도 이미 일임형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 허용 문제로 기싸움을 벌인 적이 있습니다. 금융권 관계자는 “협회장이라는 위치에다가 두 회장 모두 업권에 대한 애정이 유난히 깊은 내로라하는 금융 전문가라서 더 그런것 같다”며 “당분간 이같은 신경전은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귀띔하더라고요. (끝)/kej@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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