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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화 주역들의 잇따른 부고, 축적의 시간은 가고 새로운 시간은 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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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준 생활경제부 기자) 오늘은 별세하신 분들의 이야기입니다. 올해 초, 여느 해보다 한 시대가 가고 있음을 절실하게 느낍니다. 강봉균 전 재정경제부 장관에 이어 GS그룹의 허신구· 허완구 전 회장이 잇따라 생을 마감했기 때문입니다. 오래전 일이 생각납니다.

◆정주영 영감의 장례식

2001년 3월이었습니다. 정주영 현대 회장이 별세했습니다. 아들들이 경영권 다툼을 벌이는 한복판에서 그는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습니다. 당시 현장팀장으로 아산병원과 청운동 자택을 오가며 장례식장을 지켰습니다. 모든 장례식 취재가 끝난 후 차에 올라탔습니다. 시동을 거는 순간 아쉬움이 스쳐 갔습니다. "저런 사람을 보내며 그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소주 한잔도 못했구나." 취재에 정신이 팔려, 그의 삶과 죽음을 마음으로 느끼지 못한 것에 대한 약간의 후회였습니다.

처음부터 정주영 영감을 그리 생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1988년으로 기억합니다. 신문에서 본 뉴스는 그에 대한 좋지 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노조가 파업을 하자 구사대를 시켜 노조 간부를 테러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정의란 단어 하나만으로도 흥분하던 대학교 2학년 시절이었습니다. 대학시절 내내 그의 이름은 ‘타도’해야 할 재벌의 대명사였습니다.

그리고 10여년 후인 1998년 기자로 영감을 다시 만났습니다. 그가 낸 금강산 뱃길에 첫배를 타고 동행했습니다. 미움이 서서히 씻겨가기 시작했습니다. 대학 후배들에게 이런 느낌을 얘기했습니다. 한 녀석이 "형 전향했네"라며 쏘아붙였습니다. 쓰게 웃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정주영 영감은 또하나의 이벤트를 만들었습니다. 소떼를 몰고 북한을 방문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당일 임진각으로 갔습니다. 취재를 위해 서 있는데 저 멀리서 트럭에 실린 소떼가 몰려오는 광경을 봤습니다. 뭐라고 말하기 힘든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한 성공한 노인의 귀향’이 아니었습니다. 한 사람이 역사를 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랜 기간 쌓아온 미움과 증오를 그가 모두 가져가버린 것 같았습니다. 그가 판문점을 통해 돌아오며 한 말은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거기는 너무 어두워." 영감은 전기가 부족한 고향의 현실이 안타까웠나 봅니다. 그 안타까움은 젊은 기자의 마음으로 고스란히 전달됐습니다.

그는 그렇게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걷어간 듯 합니다. 사후 현대중공업은 광고를 할때 영감을 등장시켰지만, 시청자들의 반감은 없었다고 들었습니다.

◆하이타이의 주역 허신구

지난주 일요일 오전 회사를 출근해 한 기업인의 별세 소식을 접했습니다. 허신구 GS리테일 명예회장이라고 했습니다. 경제기자 생활 20여년을 했지만 생소한 이름이었습니다. 물론 GS일가의 형제들이 많은 탓도 있긴 합니다.

잠깐 LG그룹과 허씨 일가에 대해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LG그룹은 구씨와 허씨가 공동 창업한 회사입니다. 창업자는 구인회와 허만정이었습니다. 일제때 독립운동가들에게 자금을 지원했던 기업인도 그들입니다. 이들의 자손들이 LG, LS, GS, LIG 등의 그룹으로 분화됐습니다.

이번에 세상을 뜬 허신구 회장은 허만정의 여덟 아들 가운데 4남입니다. 찾아봤습니다. 그의 이력 가운데 LG화학 사장이 있었습니다. LG화학 50년사를 뒤졌습니다. 곳곳에 허신구란 이름이 등장했습니다.

허신구 회장은 한국의 빨래문화를 바꿔놓은 ‘하이타이’ 탄생의 주역이었습니다. 젊은 세대들에게 생소할 지 몰라도 하이타이는 집들이 선물 1호였습니다. 가루세제는 그냥 하이타이라고 부를 정도로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는 1962년 해외를 돌아다니다 가루로 빨래를 하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리고 회사(락희화학, 현 LG화학)에 "우리도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경영진들은 시기상조라고 했습니다. 빨래비누를 팔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에서 한국기업들의 대표적 전략인 추격자전략의 일단을 봅니다. 해외 선진시장에서 잘되는 제품을 만들어 파는 것.

허신구(당시 상무)는 줄기차게 주장했습니다. 가루 세제를 만들자고. 일은 다른 곳에서 풀렸습니다. 2년후인 1964년 경쟁자였던 애경이 미국에서 오는 AID차관을 활용해 가루비누를 만들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락희화학은 깜짝 놀랐습니다. 경쟁사보다 더 빨리 만들자는데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락희화학은 허신구에게 이 일을 맡겼습니다.

그는 해결사 역할을 합니다. 미국 기술을 들여와 만드는 것보다 더 빨리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일본을 발견했습니다. 일본으로 날아갔습니다. 가장 빨리 기계를 납품할 수 있는 회사를 찾아낸 것이 그가 한 일입니다. 그리고 1966년 하이타이 첫제품이 나왔습니다.

하이타이가 처음부터 잘 팔린 것은 아닙니다. 냇가에서 돌위에 빨랫비누를 문지르던 시절입니다. 전기 세탁기도 갓 나왔습니다. 재고가 쌓여 생산을 중단하기도 했습니다. 이번에 그는 영업맨으로 변신합니다. 영업 인력을 동네로 보냅니다. 동네에서 판을 깔아놓고 하이타이 사용법을 보여줬습니다. 그도 직접 했습니다. 얼마후 하이타이는 모든 세제를 밀어내고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합니다.

이후 허신구 회장은 장기간 LG화학 사장자리에 있었습니다. 울산과 여천에 대규모 석유화학 공장을 세운 주인공이었습니다. 또 LG가 무역업에 진출하는 토대를 쌓기도 했습니다.

◆산업화 시대의 또다른 주역 관료

기업인들이 낙후된 산업을 일으키는 동안 관료들은 경제사회발전 방안을 기획하고, 국가의 돈으로 뒷받침했습니다. 1968년 고시에 합격한 강봉균 장관은 그 대표적 인물 가운데 하나 입니다. 그는 정부가 기업들이 하지 못하는 연구개발을 지원하는 국책과제라는 말을 만들어낸 주역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 경제뿐 아니라 사회발전을 위한 공헌도 했습니다.

진념 장관은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1976년 제4차 경제개발 계획을 준비할 때 일입니다. 건설 수출 중심의 5개년 계획에 강봉균 과장, 진념 사무관은 반대했습니다. 경제뿐 아니라 복지사회 건설을 위한 사회개발 전략을 4차 계획에 반영하자고 주장했습니다. "사회개발 전략이 없는 4차 계획은 만들지 않겠다"고 이들은 버텼습니다. 그리고 장차관을 설득했습니다. 진 장관은 "그 결과 사회개발과 ‘형평’의 개념을 4차 계획에 반영했다"고 전했습니다.

과장 시절인 1980년대 초, 신군부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에 고인을 영입하려 하자 “그런 곳에 안 간다. 그쪽으로 발령을 내면 공무원을 그만두겠다”며 거부하기도 했습니다. 경제개발 연대 최고의 요직이라는 경제기획원의 경제기획국장을 4년이나 지낼 정도 탁월한 실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리고 1997년 외환위기가 터졌을 때는 이헌재 이기호 등과 함께 이를 수습한 주역 중 한 명이 됐습니다.

그렇게 한 시대를 살고, 죽기 직전까지 토론회에서 한국경제의 미래를 걱정하다 그렇게 갔습니다.

◆축적의 시간, 연결의 시간

이렇게 한명 한명 시대의 주역들이 떠나가고 있습니다. 이들을 기록하고 기억하는 것은 단지 한 인물에 대한 얘기가 아닙니다. 한시대를 살다 간 우리 어머니 아버지, 젊은 세대들에게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이야기 입니다.

정주영 영감이 중동시장을 개척한 것은 국가와 자식을 위해 자신의 한몸을 바쳤던 중동의 전사들이 있기에 가능했습니다. "내 세대는 가난해도 자식들 만큼은 교육시켜 나처럼 살게하지 않겠다"며 공장일, 식모일을 마다하지 않았던 그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한국의 산업화를 이뤄낸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주역들입니다. 그들 중 한명 또는 그 자식들 중 한명이 기업인이 되고, 관료가 되고, 정치인인 됐을 겁니다. 그게 어쩌면 한국 사회를 이토록 역동적으로 만들지 않았을까 합니다.

경제신문 기자가 한 사람을 보내는 것은 이런 역사를 기록하며, 되돌아 보는 작업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오늘 그들을 보내며 풀어야 할 숙제가 하나 떠오릅니다.

"산업화를 상징하는 축적의 시간은 그들과 함께 가고 있다. 다가오는 시간은 어떤 시간일까. 한국사회는 이 새로운 시간을 맞을 준비가 돼 있을까?" (끝) / juny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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