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리귤라는 세금을 받아 사치낭비에 쏟아 부었다. 믿기지 않는 것은 이렇게 긁어 모은 금화들을 길거리의 행인들에게 뿌려댔다고도 하니 로마라는 사회가 어떻게 유지되었는지는 불가사의의 하나다. 갈리귤라는 스스로 포주가 되었던 것은 물론 인신의 매매를 주최하기도 하고 귀족들을 강제로 참여시킨 경매에서 자신이 값을 매긴 노예들(많은 경우에서 그들은 성의 노예들이기도 했다)을 강제로 팔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기번은 로마제국 쇠망사를 쓰면서 이런 부분들에 대해 극히 절제된 표현만을 하고 있지만 철인황제 아우구스투스 이후 정신의 해이가 큰 몫을 했던 것도 분명할 테다.
니체식으로 표현하자면 권력에의 의지를 이미 상실한 로마이기도 했다. 독일 깊숙이 습지로까지는 더 이상 들어갈 필요도 없이 정복은 완성되었고 이제 변방의 일은 변방에서 처리하면 그만이었다. 귀족들은 라티푼티엄이라고 불리는 장원에서 자신의 세계만을 잘 지켜내면 그만이었다. 변방에는 적대적인 야만족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지만 한번씩의 소탕작전으로 국경 밖으로 밀어내면 그만이었다. 결국 사해동포주의가 나오고 정신은 해이해진다.
로마가 동방을 정복했을 때 그리스와 그리스 동방의 다양한 성풍속들이 유입되었고 지극히 속화된 모습으로 현실로 되었다. 동방에서의 매춘부는 대개 신전창부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로마는 철저히 세속적인 창녀들이었다. 운치나 낭만 같은 것이 있을 수 없었다. 이것이 속화된 모습이다. 물론 과거란 언제나 미화되기 마련이기도 하지만 우리나라의 기생들도 비슷한 대접을 받고 있다. 월매가 딸을 잘 치우기 위해 악을 쓰는 모습은 퇴기의 그것과는 잘 어울린다.
한번 속화되기 시작하면 바닥은 없는 법이다. 타락에는 끝이 있을 수 없는 것과 같다. 갈리귤라는 매춘부들로부터 매달 손님 한 사람이 지불하는 금액을 세금으로 걷었다. 당시 세금이 대체로 10분의1세에 그쳤다는 것을 고려하면 비슷한 비율로 세금을 거두지 않았나 생각된다. 물론 창녀 한 사람이 하루에도 여러 명 심지어 10명이상씩 해치울 경우도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아주 낮은 세율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