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性속의 경제史

(性속의 경제史) 로마시대의 매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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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담·성풍속연구가) 매춘은 역사가 오래된 것이다. 오리엔트는 매춘에서도 한발 앞서나갔지만 그리스 로마 시대에 오면 다만 원산지에 불과한 정도가 되고 만다. 쉬메르나 우르의 고대문명들에 관한 다양한 기록들은 모두매춘에 관한 풍부한 기록들을 남기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전해주고 있다. 시간대로 따지면 적어도 지금으로부터 3천년 이상 고대의 기록들임에 분명하고 여성의 공양이라는 소위 신전 창녀를 따지면 역사는 이보다 더욱 오래됐을 것이다.

로마시대가 되면 이미 매춘은 완전히 세속적인 것이 되고 만다. 놀라울 정도의 가부장적인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던 유대인들은 물론 매춘을 죄악시하고 창녀를 천하게 취급했지만 우리가 이미 그리스의 예에서 보았듯이 매춘녀가 늘 하급 인종으로 취급되었던 것은 아니다. 성경에는 창녀 마리아막달레나의 이야기를 쓰고 있는데 예수는 그 유명한 『돌을 던질 자 있으면 나와 돌을 던져라』는 말로 창녀에게 조차 구원의 길을 열고 있다. 물론 예수는 그로 인해 반대파들의 표적이 되기도 한다마는.

그리스 고급창녀를 헤타이라라고 하지만 이들 헤타이라들은 모두 교양계급을 대표하는 여자들이었고 동시에 사교계를 대표하는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로마시대가 되면 이런 창녀들은 거의 모습을 감추게 된다. 확실히 로마의 여인들은 그리스의 여인들에 비해 높은 정치참여와 사회적 권리를 향유하고 있었다. 그리스 여인들이 다만 아이를 낳고 집안의 자질구레한 살림만을 살았던데 비해 로마의 여인들은 거리를 활보하고 스스로의 권리를 주장하는 나름의 사회적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니 자연 헤타이라같은 고급 창녀들이 발을 붙이기는 힘들어지게 됐다.

지식을 갖춘 여자들은 창녀가 되지 않고도 얼마든지 사회적 욕구를 충족했다. 결국 창녀는 신분이 낮은 계층에서 공급되고 이는 반복적으로 창녀의 역할을 다만 성적인 불만을 해결하는 존재로 그치게 하는 계기를 이뤘다. 물론 사학자들은 로마에서도 유한 부인들의 존재 특히 1년 또는 그 이상의 기간을 정해 첩살이와 비슷한 결혼생활을 하는 여인들에 관한 기록을 찾아내고는 있지만 이것이 주류는 아니었던 것 같다.

갈리귤라는 매춘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그는 무한한 낭비벽으로 유명했는데 낭비벽을 만족시킬만한 돈이 부족하자 스스로 공창을 열어 세금을 거뒀다. 아마도 이것이 로마 최초 공창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스에서는 현자 솔론이 공창을 열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로마에서는 영광스럽게도 갈리귤라였다.

갈리귤라는 로마의 아름다운 궁정 안에 창가를 열고 수요와 공급을 창출했다. 귀부인과 미소년들을 고용하는 한편 길거리에 뚜쟁이를 풀어 호객해온 것으로 전하고 있지만 글쎄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창가에 귀부인들은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지만 미소년들은 또 무엇인가.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갈리귤라는 스스로를 양성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남색이든 여자와의 섹스건 전혀 가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요즈음 우리가 어렵사리 접할 수 있는 포르노와 전혀 다를 게 없다. (끝)

오늘의 신문 - 2024.05.04(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