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性속의 경제史

(性속의 경제史) 간통 아내 죽일 권리 가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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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담·성풍속연구가) 로마는 처음에는 남성들의 사회였다. 여자들이 광장으로 몰려나와 남녀동등권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일 때까지는 철저한 남성위주의 사회였다. 남녀의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는 시위라고 해본들 화장하고 금붙이로 목걸이 해걸고 사치할 권리를 요구한 것에 불과한 것이기도 했다. 물론 나중에는 남자들과 같이 바람피울 권리를 요구하는 일련의 대중집회가 있기는 했지만 로마의 여인들은 한동안은 현모양처들이었다. 로마가 세계 지배에 성공했을 때 그리고 정복지로부터 수도없는 화려의 극에 달하는 사치품들이 쏟아져 들어올 때까지는 로마는 엄숙함과 검소함, 숭고한 의무 등으로 가득차 있었다. 이런 도덕은 곧 군인들의 도덕이기도 했다. 그들이 에페닌 반도를 모두 장악하기까지만해도 군인들은 거친 빵조각과 신포도주를 마시며 엄격성을 유지했다.

남자들은 여성들과 부인들에 대해 거의 우리나라 조선시대에 남성들이 가졌던 권리 이상의 절대권력을 휘둘렀다. 기원전 1세기까지만 해도 남편은 간통중인 아내를 현장에서 죽일 법적인 권리를 갖고 있었다. 비록 간통 현장을 적발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간통의 증거가 있으면 남자는 여자를 죽일 수 있었다.

여자는 술을 마셔서도 안되었다. 술은 만인의 적으로 간주되어 있던터라 항차 여자가 술을 마신다면 이는 곧 타락을 의미했다. 그래서 여자가 술을 마신다면 이는 곧 도덕적인 타락을 의미했고 이때 남자는 이혼을 요구할 수 있었다.

이해하기 힘든 것은 여자가 만일 고집이 세어서 남자의 요구를 거절하거나 남자가 다른 사람들에게 아내의 행동으로 인해 궁지에 몰리게 된다면 이 역시 이혼의 사유가 되었다. 로마는 이렇듯 남성위주의 사회였다. 로마를 연구한 전문가들은 고대 로마 사회를 신석기 시대의 연장선에 불과했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마치 우리나라의 칠거지악 이상가는 엄격성이 여인들에게 요구되었고 이는 강건한 군인사회의 기초를 형성했다. 이는 스파르타와도 같은 구조였다고 평가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여자아이들은 성장해 25세 정도가 될 때까지는 아버지의 강력한 보호를 받았고 이는 결혼을 해서도 어느정도 이어졌다. 결국 여인들은 어려서는 아버지를 따르고 결혼해서는 남편을 따르고 늙어서는 아들을 따르는 식의 3종지도가 로마의 여성들을 지배했다.

기원전 3세기말 한니발과의 전쟁이 절정에 달했을 때 로마에서는 옵피우스법이 제정되었다. 이 법은 여성이 소유할 수 있는 금붙이를 반온스 이하로 제한하고 염색한 옷을 입을 수 없도록 하는 것외에도 마차를 타고 외출하는 일까지도 금지시켰다. 이는 마치 2차대전 상황으로 남성들은 군대내에서 엄격한 규정에 따라 행동해야했던 반면 여인들은 사회가 요구하는 전시법령에 따라 검소하고도 조신한 행동을 하도록 강요받았다.

오늘의 신문 - 2024.05.03(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