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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性속의 경제史) 일본의 춘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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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 ‘저팬열풍’ 일으켜
19C말 상인 통해 전달 … ‘우키요에’ 최고봉

(정화담·성풍속연구가) 춘화도 잘만 그리면 예술이 된다. 사실 예술과 외설을 구분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누드와 단순히 벌거벗은 것이 결코 엄청난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듯 춘화와 예술도 종이 한장의 차이밖에 나지 않을 것이다.

단원이 그렇고 혜원이 그렇다. 성애소설과 에로 소설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잘알고 있는 노벨상 수상작가 오오에 겐자부로도 지독한 성애소설을 쓰고 있다. 겐자부로의 소설은 지하철안에서 남자가 물건을 꺼내들고 자위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을 정도이니 성애소설과 에로 소설을 구분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춘화도 마찬가지다. 감흥을 목적으로 그려지면 분명 외설적인 것이 분명할 터지만 단순히 외설이라고 하기에는 뛰어난 예술성을 갖고 있던 종류의 춘화들이 적지 않다.
필자는 에로소설의 작가로 <북회귀선>의 헨리 밀러나 <채털리부인의 사랑>의 로렌스도 높이 치고 있지만 오오에 겐자부로는 단연 최고봉에 올라있다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일본의 「우키요에」 다시말해 「마쿠라에」들은 춘화에 있어서도 단연 최고봉이라고 할 것이다. 도덕군자들이 보기에 따라서는 춘화면 춘화지 거기에 무슨 격조가 있겠느냐고 말할 수 있겠지만 자칫 저질의 나락으로 굴러떨어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춘화야말로 화가의 격조가 없이는 금방 저질스러움의 포로가 될수밖에 없다.

춘화는 19세기 유럽에 일본 열풍을 일으키는 한 중요한 요인도 되었다.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엽에 걸쳐 일본풍 의상을 비롯, 일본풍 예술은 유럽의 사교계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일본풍 드레스는 특히 사교계 귀부인들의 높은 관심을 끌었고 이런 배경에는 일본의 「우키요에」가 장기간에 걸쳐 그들의 시각을 붙들어맨 것도 한 요인으로 자리하고 있다.

특히 「마쿠라에」는 귀족층은 물론이고 서민들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다. 그들의 미세한 것에 대한 취미는 춘화에도 그대로 드러나 여자들의 음모는 한올한올 치밀하게 그려졌고 남성의 물건은 굵고 가는 실핏줄들까지 치밀하게 묘사해 한창 화가 나있는 장면을 적나라하게 그려놓고 있다. 이런 그림들이 네덜란드 상인들이 수입하는 도자기들의 포장지가 되어 유럽의 화가들을 중심으로 급속하게 퍼져 나갔다.

당시 암스테르담 파리 등 도시들은 화가들이 집중적으로 모여살던 곳이었고 이들 화가들은 사람의 사는 모습 특히 술집이나 주색가 창녀들에 대한 집요한, 도덕군자들이 보면 천박하기 짝이 없는 취미들을 즐기고 있었다. 사실 그때나 지금이나 예술가들은 타고난 자유분방한 성격이나 이상으로 인류의 성생활을 리드해왔다.

파리의 유명한 몽마르트르 언덕을 내려서면 한국인 관광객들이 오늘밤도 찾아들고 있는 피갈 거리가 있고 유명한 물랭루주 극장이 있다. 모두가 예술가들의 거리였고 퇴폐 향락의 거리였다. 이들 거리에 일본의 춘화들이 몰려들었다. 일본의 그림들은 일본보다도 더욱 먼저 유럽을 흔들었고 이국취미의 한 형태로 일본 열기를 만드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됐다. (끝)

오늘의 신문 - 2024.06.28(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