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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시 사태와 '민중의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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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연 문화스포츠부 기자) 지난 26일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에서 연극 ‘민중의 적’이 막을 올렸습니다. 유럽 연극계의 ‘슈퍼스타’로 꼽히는 토마스 오스터마이어 연출가와 독일 실험연극의 산실로 불리는 샤우뷔네 베를린의 내한공연이었습니다. 이날 신선한 광경을 목격해 독자들에게 소개해볼까 합니다.

19세기 극작가 헨리크 입센이 쓴 ‘민중의 적’은 사회성이 짙은 작품입니다. 진실을 폭로하려는 소수와 이를 저지하려는 다수의 싸움을 그렸습니다. 의사인 토마스 스토크만 박사는 마을 온천수가 근처 공장 폐수로 오염된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더 많은 피해를 막기 위해 이 사실을 언론에 폭로하려고 하죠.

문제는 마을이 이제 막 온천마을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시점이라는 겁니다. 시의원이자 그의 형인 피터 스토크만(정치인)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에 해가 될까 동생을 막습니다. 오염 지역에서 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스토크만 박사의 장인(기업가) 역시 박사를 압박합니다. 보도를 약속했던 기자들(언론)도 그에게서 등을 돌립니다. 대중들 역시 관광도시로서 받게 될 경제적 타격을 우려해 진실을 은폐합니다. 정치인, 기업가, 언론, 대중 등 ‘다수’가 원하지 않는 진실을 폭로하려고 한 스토크만 박사는 ‘민중의 적’으로 낙인찍힙니다.

이 작품을 통해 입센은 “다수는 항상 옳은가”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많은 나라에서 새롭게 연출된 작품이지만 오스터마이어 버전이 특별히 인기를 끄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스토크만 박사의 군중 연설 장면 때문인데요. 스토크만 박사는 연설을 통해 “진실의 최악의 적은 침묵하는 다수다. 이익을 위해 침묵하는 다수, 진실을 외치는 소수, 누가 민중의 적인가”라고 말합니다. 이에 반대하는 극중 인물들은 스토크만 박사를 매도하며 관객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관객을 토론자로 끌어들이는거죠.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공연에선 화가 난 관객들이 배우와 30분간 설전을 벌이기도 했죠.

사실 공연을 앞두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한국 관객들이 얼마나 토론에 참여할까?”였습니다. 독일어로 진행되는 공연인데다 관객들이 이런 공개적인 토론 문화에 익숙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그런데 걱정도 잠시, 반응은 뜨거웠습니다.

그 중에서도 한 여성관객의 대답이 인상 깊었는데요. 그는 “연극에선 온천수 오염 문제를 이야기하는데, 한국에는 수십명이 죽어간 ‘옥시 사태’가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어 “사건이 터진 후 약 10년 동안 정권이 몇 번이나 바뀌었지만 진실은 은폐됐다”며 “국가와 거대기업은 책임을 회피했고, 도덕과 윤리를 외면했으며, 인간 가치를 말살시켰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를 제대로 보도하지 않은 언론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했습니다. 객석에서는 박수가 쏟아졌습니다.

신기하게도 200여년 전 쓰인 작품 속 상황과 옥시 사태는 닮은 구석이 많았습니다. 국가와 정치인, 거대 기업, 언론은 각자 서로 다른 이유로 이 사건을 묻어두었죠. 다른 점이 있다면 피해자들만이 진실을 위해 싸웠던 옥시 사태와 달리 스토크만 박사는 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는 한 사람의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도덕과 윤리를 걸고 총대를 메고 싸웁니다. 자신에게 아무런 이득이 되지 않는 일임에도 말입니다. ‘불편한 진실’을 폭로하고자 한 그에게 대중들은 계란을 던집니다. ‘공공의 적’이 된 그의 부인은 직업을 잃고, 집주인은 재계약을 거부하며 그는 최악의 상황에 몰리게 됩니다. 그럼에도 그는 현실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최근에 읽은 ‘불가능의 예술’이라는 책이 떠올랐습니다. 위대한 극작가로서 전체주의에 대항해 싸웠고, ‘벨벳 혁명’ 이후 체코슬로바키아의 대통령이 된 바츨라프 하벨의 연설문을 모아놓은 책입니다. 그는 ‘국제 연극의 날 기념 연설’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세계가 최악의 종말에 이르지 않으려면 연극은 보호하고 양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연극은 대체 불가능한 인간 주체성의 회복, 특별한 인간의 개성과 그 양심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연극은 오늘날 인류가 바라는 것을 무대에서 구현해냅니다. 양심과 도덕이 사라진 시대에서도 총대를 메고 나서는 스토크만 박사의 모습에서 하벨이 말한 ‘연극의 의미’가 떠올랐습니다. 이번 주말 이 멋진 토론에 동참하는 것은 어떨까요. 공연은 28일까지입니다. (끝)/yeo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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