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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라벨에 명화를 넣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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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지성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 올해 초 프랑스 최고 와인 브랜드 중 하나인 샤토 무통 로칠드는 자사의 대표 와인의 2013년 빈티지 라벨에 국내 최고 서양화가 중 한 명인 이우환 화백의 작품을 활용하기로 결정했다.

샤토 무통 로칠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부터 매년 자사의 대표 와인인 ‘샤토 무통 로칠드’ 라벨 디자인을 화가들에게 의뢰해 온 것으로 유명한데, 파블로 피카소, 앤디 워홀, 후안 미로, 프란시스 베이컨, 제프 쿤스 등 기라성 같은 작가들이 라벨을 디자인해 왔다.

고가 와인 소비자들 상당수가 높은 수준의 예술적인 취향을 갖고 있는 것을 염두에 둔 라벨 마케팅 전략은 샤토 무통 로칠드가 세계 최고 와인 브랜드의 지위를 유지하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해 왔을 것이다.

‘쓱 하세요.’ 이 알쏭달쏭한 문구는 신세계그룹에서 자사의 통합 온라인몰인 SSG닷컴(SSG.com)을 홍보하기 위한 동영상·TV 광고에 사용된 남녀 등장인물 간 대화 내용 중 일부다.

이 광고는 미국의 대표적인 사실주의 화가인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 속 설정을 기반으로 했는데, 호퍼의 작품을 영화화한 ‘셜리에 관한 모든 것’에도 유사한 장면이 나온다. 이 광고 이후 SSG닷컴의 신규 가입자 수는 전년 동기 대비 28%, 매출은 32% 증가했다고 한다.

SSG라는 쇼핑몰의 명칭을 ‘쓱’이라는 한글로 적고 발음하는 재치도 재미있었지만, 호퍼를 좋아하는 소비자와 영화 ‘셜리에 관한 모든 것’을 본 사람들이 이를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로 적극 전파해 광고 효과가 극대화한 것도 주요 요인으로 분석된다.

◆ 에드워드 호퍼 작품서 광고 아이디어

마케팅에 직간접적으로 미술·음악 등 문화·예술적 요소를 차용하는 것은 앞에서 말한 샤토 무통 로칠드에서 보듯이 꽤 오래전부터 존재하던 마케팅 방식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의류·식품·전자 제품 등 보다 다양한 영역으로 적용 범위가 확대되고 있고 그 방식에서도 전시 행사 후원 위주의 전통적인 마케팅에서 광고에 예술 작품 등을 차용하거나 제품 자체에 예술적 요소를 가미하는 적극적인 방식으로 확대되고 있다.

예술은 제품이나 브랜드에 ‘유구한 역사’, ‘장인 정신’, 또는 ‘취향의 선도자’라는 이미지를 부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기업들에는 매우 유용한 마케팅 소재다. 또한 소비자도 자신이 보유한 특정 예술 분야에 대한 조예를 자연스럽게 노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취향의 리더십을 과시할 수 있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특히 소셜 미디어 등 자신의 취향을 공유하거나 과시할 수 있는 플랫폼이 자리 잡으면서 소비자들의 이러한 욕망을 강화시킨다. 글·사진·동영상 등 다양한 일상 콘텐츠의 공유 과정에서 소비자들은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고 이를 통해 ‘취향의 우수성’을 인정받고 싶어 한다.

미술을 마케팅에 활용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 정도로 구분된다. 첫째는 ‘아트 인퓨전’으로, 주로 이미 완성돼 있는 작품을 마케팅의 목적으로 광고나 제품 패키징 등에 활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는 ‘컬래버레이션’으로 제품의 실제 디자인이나 제작 과정에 예술가가 참여해 제품의 외관 등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활동을 지칭한다.

◆ 프리미엄·럭셔리 마케팅에 자주 활용

아트 마케팅은 특성상 프리미엄이나 럭셔리 브랜드의 마케팅에 주로 사용돼 왔지만 최근 미술의 저변이 넓어지고 취향 향유에 대한 소비자들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다양한 브랜드 세그먼트 및 제품 영역으로 활용이 확대되는 추세이며 활용 방식에서도 새로운 시도들이 등장하고 있다.

일본의 중·저가 의류 브랜드인 유니클로는 앞에서 말한 아트 인퓨전과 컬래버레이션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세계 최고의 현대미술관 중 하나인 미국 뉴욕의 현대미술관(MoMA)은 3만원에 육박하는 비싼 입장료로 유명하기도 하다. 하지만 매주 금요일 오후 4시부터 8시까지는 입장료를 내지 않아도 된다.

유니클로가 이 시간의 입장료를 ‘관람객 대신’ 내주기 때문이다. 각 전시별 후원이라는 전통적인 마케팅 방식에서 벗어나 제한된 시간에 방문하는 관람객에게 공짜 관람의 기회를 제공하는 새로운 후원 방식은 관람객 개개인에게 브랜드의 기여 포인트를 명확히 함으로써 브랜드에 대한 인지도와 선호도를 크게 높이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유니클로는 또한 MoMA와 함께 서프라이즈 뉴욕(SPRZ NY)이라는 컬래버레이션을 진행하기도 했다. 자사의 프린트 티셔츠에 MoMA에서 소장하고 있는 예술가의 작품을 프린트하거나 패턴화했고 앤디 워홀, 장 미셸 바스키아 등 유명 작가들의 작품을 활용했다.

이러한 컬래버레이션 아이템들 중 일부는 이후 유니클로의 전 세계 모든 매장에서 판매하는 그래픽 티 컬렉션에 포함돼 현재까지 판매되고 있다.

현대자동차 또한 다양한 아트 마케팅을 시도하고 있다. 현대차는 2014년 영국 런던의 테이트모던미술관을 11년간 장기 후원하는 협약을 맺었고 10년간(2015~2025년) 매년 6개월씩 ‘더 현대 커미션(The Hyundai Commission)’이라는 이름의 전시를 열기로 했다.

또한 미국 로스앤젤레스(LA)의 LA카운티미술관과도 10년 파트너십을 맺고 ‘아트+테크놀로지 프로젝트’라는 테마로 매년 전시를 열고 있다.

국내에서도 ‘브릴리언트 메모리즈’라는 테마로 현대차 사용자들의 자동차 관련 추억들을 사연으로 받아 이를 설치미술 작가들이 작품화해 전시하고 그중 일부는 TV 광고에 활용하는 등 소비자들의 추억을 미술과 연계하고 이를 다시 마케팅에 활용하는 아트 마케팅의 진화를 보여주고 있다.

◆ 추억을 미술로 표현하고 다시 마케팅으로 활용

미술 시장은 최근 수년간 큰 폭의 성장을 거듭하고 있고 베이징·상하이·홍콩·두바이·아부다비 등 신흥 글로벌 도시들은 최근 미술관 신축을 비롯해 미술 관련 투자를 큰 폭으로 확대하고 있다.

미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관광객들을 끌어들이고 도시의 이미지를 개선하는 데 미술이 핵심 역할을 수행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이는 미술에 대한 소비자들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추세이며 기업도 미술을 비롯한 아트 마케팅 활용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것에 대한 증거이기도 하다.

진정성, 디자인 우위, 장인 정신 등은 기업 브랜드나 제품이 시장에서 성공하기 위해 보유해야 할 핵심 가치가 되고 있다. 예술 작품은 이러한 가치들을 보유하고 있는 대표적인 영역 중 하나이며 이러한 가치를 브랜드나 제품에 어떻게 효과적으로 가져올 수 있는지에 대한 본격적인 고민이 시작돼야 할 시점이다.

오늘의 신문 - 2024.11.14(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