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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 작전'처럼 진행된 위안부 할머니의 UN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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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이심기 특파원) “미주 한인들이 더 잘 통제가 된다고 하던데…”

김동석 시민참여센터(KACE) 상임이사는 최근 일본 기자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미국에 있는 한인교포들이 한국인보다 더 한국 정부의 말을 잘 듣는다는 것이었다. 이 단체는 미국 정부와 정치권을 상대로 한 미주 한인들의 정치활동을 주도하는 곳이다.

지난해 12월말 한국과 일본 정부간 위안부 협정이 타결된 이후 한국내에서는 협정 체결반대 목소리가 컸다. 하지만 미 하원의 위안부 결의안 통과를 주도하면서 국제무대에서 일본 정부를 압박하던 미주 한인들의 활동은 잠잠해졌다. 한국보다 미국내에서 위안부 문제가 불거지는 것을 훨씬 더 부담스러워하는 일본 정부로서는 최근 3개월간 미국 정가에서 이 문제가 거론되지 않자 ‘상황이 종료됐다’고 느끼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위안부 피해자인 이용수 할머니(89)가 9일(현지시간) 뉴욕을 방문, UN과 뉴욕시청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한·일간 위안부 합의는 장난에 불과하다. 할머니들이 다 죽어도 (일본군이 저지른) 죄는 남는다”며 강도높게 일본정부를 비판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뉴욕시의회의 로리 컴보 여성위원장도 기자회견장에서 “일본 정부는 정치적으로가 아니라 진심을 담아 피해자들에게 사죄하라”고 요구했다. 또 뉴욕시 공립학교에서 위안부 문제의 진실을 가르치도록 의회에 요구하기로 했다. 과거사 문제는 일단락됐다고 느긋해하던 일본으로서는 당혹스러운 소식일 수 밖에 없다.

이 할머니의 전격적인 방문은 KACE가 UN여성의 날로 지정된 지난 9일을 ‘디데이(D-day)’로 정하고 물밑에서 진행해온 결과다. UN과 뉴욕시의회와의 사전조율도 은밀하고, 치밀하게 준비했다.

아쉬운 점은 한국 외교당국의 태도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위안부 할머니들을 일본을 압박하는 레버리지로 활용하기 위해 공을 들여온 것과 달리 이번에는 무관심으로 일관한 것이다. 이번 방문은 어디까지나 정부와 무관한 개인적인 방문인 만큼 정부가 관여할 여지가 없다며 선을 그었다. 한 재미교포는 “한국 정부가 필요하면 ‘관변단체’로 활용하고, 거리를 둬야 한다고 판단할 경우 철저히 외면하는 식”이라고 비판했다. 지난해에는 위안부 이슈가 불거질 때 마다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알아볼 정도로 적극적이었지만 이번에는 일정만 체크하는 수준이었다. UN기자회견, 뉴욕시청및 위안부 기림비 방문 현장에는 단 한 명의 외교관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KACE측은 “현지 외교당국자는 본국 결정에 따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다”면서도 “위안부 문제는 민간이 문제를 제기할수록 정부 입지가 넓어진다는 점을 알아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가 ‘정세적’ 상황에 따라 일본과 합의는 했지만 이를 다시 재론하지 않는다는 ‘불가역적’ 방식에 합의한 것은 납득할 수 없다는 점도 강조했다. 한 외교당국자는 “민간이 더 열심히 하기를 바란다”고 말하면서도 ‘오프 더 레코드(off the record·보도하지 않는다는 전제로 한 발언)’라고 단서를 달았다. (끝) /sg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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