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바로가기

뉴스인사이드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향뮤직 찾아가보니

글자작게 글자크게 인쇄 목록으로

(김보영 문화스포츠부 기자) 4일 오후 3시. 서울 창천동의 오프라인 음반매장 향뮤직(향음악사)의 내부는 20여명의 사람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전자양(인디 뮤지션)’ 옛날 앨범 있어요?”(손님) “직접 찾아보셔야 돼요.”(점원) “일렉(일렉트로닉 뮤직)은 어느 쪽에 있어요?”(다른 손님) “왼쪽에 있는데, 지금은 (음반들이)좀 섞여 있어서 원하는 앨범은 직접 찾아보셔야 할 거예요.”(점원)

매장을 메운 이들은 20대 대학생부터 40~50대 중년에 이르기까지 연령대가 다양했다. 록·메탈·팝·가요·클래식·인디음악 등 다양한 장르의 음반이 뒤섞인 좁은 매장에서 이들은 손을 뻗고, 허리를 수그려 가며 음반 고르기에 여념이 없었다. 포근한 봄 날씨에 5.5평의 매장이 사람들로 가득 차니 더웠다. 한 남성은 손수건을 꺼내 연신 이마의 땀을 훔치며 음반을 찾기도 했다. 계산대 앞에서는 20여장을 한번에 사 가는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음반의 시대가 부활한 것일까. 물론 그럴 리는 없다. 가게 안이 북적이는 건 향뮤직이 오는 12일 폐점을 앞두고 지난 3일부터 전 음반 50% 할인 판매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향뮤직은 경영상의 이유로 오프라인 매장을 닫고 온라인 매장에 집중할 계획이라고 홈페이지(www.hyangmusic.com)를 통해 밝히고 오프라인 매장에 할인 판매 안내문을 걸었다. 하루 평균 30여명의 손님이 들락거리는 이 매장에 3일 하루에만 1000여명이 다녀갔다.

퍼플레코드·미화당·상아레코드…. 거의 모든 오프라인 음반매장이 문을 닫았다. 향뮤직 차례가 오고야 말았다. 일부 음반을 제외하면 모든 장르의 음악을 디지털 음원으로 접할 수 있는 시대다. 1991년부터 향뮤직을 이끌어 온 김건힐 사장(51)은 이날 오후부터 매장에 나와 손님들을 지켜봤다. 김 사장은 “마음을 접기까지 1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고 했다. “스물 일곱 살에 시작한 가게예요. 반평생을 바친 일이니까…. 어떻게든 살려 보려고 경제적으로 무리도 많이 했는데 답이 안 나오더라고요.”

음반의 시대가 있었다. 1998년 100만장 이상 팔린 앨범은 김종환과 H.O.T, 김건모, 서태지, 신승훈 등 5장이나 됐다. 지금은 음반 초도물량이 1000장을 넘는 경우가 드물다. 이유겸 유니버설뮤직 과장은 “그나마 1000장이라도 찍는 것은 클래식 분야 뿐”이라며 “대중음악 분야에서는 CD나 LP 같은 물리적 음반이 의미가 없어진 지 오래 됐다”고 했다.

대부분의 음반사가 대중음악 분야 CD 판매량은 더 이상 의미있는 수치로 여기지 않는다. 그나마 클래식 분야에서 물리적 음반이 강세인 이유는 클래식 음악의 특성상 고음질로 음악을 즐기려는 음악 팬이 많기 때문이다. 유니버설뮤직·워너뮤직·소니뮤직 등 대형 직배사의 클래식 음악 매출은 물리적 음반과 디지털 음원의 비율이 약 5대1이다. 그런데도 1만장을 찍으면 ‘잘 나가는’ 음반으로 여긴다. 지난해 국제 쇼팽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한 조성진의 음반이 현재까지 기업판매를 빼고 9만2000장이 팔린 것은 극히 이례적인 ‘사건’이다.

대중음악 CD 시장이 저무는 동안 향뮤직만큼 고군분투한 회사도 없다. 인디음반 위주의 곡 순위인 ‘향뮤직 차트’를 개발하기도 하고, 회원음반 경매 시스템도 만들었다. 라이너스의담요·페퍼톤스·줄리아하트 등 인디 뮤지션을 발굴해 그들이 커나가는 모습도 지켜봤다. 향뮤직과 인연을 맺은 밴드와 단골 손님, 인근 홍대의 클럽 사장 등이 폐업 소식을 듣자마자 향뮤직을 다녀갔다. 지난 3일에는 밴드 크라잉넛과 홍대 공연장 ‘벨로주’의 박정용 대표 등이 방문했다.

“저희 가게가 좁잖아요. 이렇게 사람들이 붐비는 걸 보고 손님들이 가장 많이 하시는 얘기가 ‘평소에 이 정도만 붐볐어도 향뮤직이 문을 닫지 않았을 텐데….’였어요. 운영하면서 하루 매출이 안정적이지 않은 부분이 제일 힘들었습니다. 특정 아티스트의 신보가 나오면 그날은 몰리는데 평소에는 한가하고, 매출이 심하게 들쭉날쭉했어요. 지난 3년간 적자였죠.”

2000년대 이전 시대를 풍미했던 수많은 레코드 가게가 다 사라졌다. 서울 압구정동 신나라레코드, 닫았다. 인근의 상아레코드, 닫았다. 대학로 명소로 클래식 장르가 유명했던 ‘바로크레코드’는 설렁탕 프랜차이즈 가게로 탈바꿈했다. 영국 음반회사 EMI 수입대행사로 유명했던 용산의 예인사도 닫았다. 홍대 퍼플레코드, 미화당, 레코드포럼 모두 폐업했다.

전국음반소매상연합회장을 역임한 김 대표는 “예전에 많았던 음반 관련 협회 중 지금 남아있는 곳이 없어 전국적으로 오프라인 음반 가게가 몇 군데 남아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면서도 “거래처 얘기를 들어보면, 신보를 정기적으로 받아 음반을 매장에 비치하는 전통적 의미의 레코드점은 10곳 안쪽인 것 같더라”고 말했다.

이날 매장을 방문한 한 남성(35)은 흑인 음악의 팬이라고 했다. “90년대 중반부터 향뮤직을 찾았던 것 같아요. 사라지는 게 아쉽지만 어차피 제가 아는 모든 레코드 가게가 이미 문을 닫았기 때문에, 놀랍지는 않죠.” 또 다른 여성(33)은 일본음악을 향뮤직에서 처음 접했다고 했다. “향뮤직에만 독점적으로 들어오는 음반들이 있었어요. ‘라르캉시엘’ ‘각트’ 등 고등학교 시절 J팝 앨범 고르러 가던 기억이 생생해요.” 김 사장은 “학생 시절 손님이었다는 남자가 자신의 아이를 데리고 다시 찾았을 때 가슴 뭉클했던 적이 있다”고 했다.

향뮤직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온라인 사업과 더불어 조그마한 사무실을 공개 운영할 계획이다. 김 사장과 직원 1명, 아르바이트생 3명 등 다섯 식구가 조촐하게 꾸리는 이 사무실은 이번에 폐점하는 향뮤직 오프라인 매장 뒷편에 있다(서울 서대문구 창천동 33-16 5층). “사무실을 개조해서 신보 위주의 작은 오프라인 매장을 만들려 해요. 저희들이 일하는 공간이자 손님이 와서 커피 한 잔 마시며 앨범을 둘러볼 수 있는 공간이죠. 지금처럼 많은 음반은 놓을 수 없어요. 새로 투자를 해서 해볼 형편은 안 되고,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공간을 만들면 만족입니다.”

김 사장이 해보고 싶은 일은 아쉬운 ‘구보’를 재발매하는 기획이다. “저희는 한류의 영향이 없는 매장이에요. K팝이 아니라 다른 장르의 음반이 인기가 있다는 거죠. 마니아층이 주 고객이라는 얘기죠. 그 장점을 살려서 예전에 발매됐다가 절판된 음반들, 녹음은 됐지만 정식 발매가 되지 못한 음반들을 다시 발굴해서 독점 제작해보고픈 욕심이 있어요. 오프라인 매장 폐점은…. 그래도 많이 쓸쓸하네요.” (끝) /wing@hankyung.com

오늘의 신문 - 2024.05.07(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