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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계 '응답하라 1996'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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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태형 문화스포츠부 기자) 20년 전 국내 공연계로 거슬러 올라가 볼까 합니다. 1996년엔 초연작이나 국내에서 처음 선보인 작품들 중 흥행 열풍을 일으킨 공연들이 많았습니다. 1995년 12월30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에서 막을 올린 뮤지컬 ‘명성황후’가 해를 넘기며 본격적으로 흥행몰이에 들어갔고, 그해 2월 화성 연쇄 살인사건을 소재로 만든 미스터리 추리극 ‘날 보러와요’가 대학로에서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습니다.

이어 5월 서울 호암아트홀 무대에 오른 뮤지컬 ‘브로드웨이 42번가’는 국내에서 대기업(삼성영상사업단)이 대규모 자본을 투자해 처음 제작하는 대형 뮤지컬인 데다 미국 브로드웨이 히트작을 거액의 로열티를 주고 들여와 우리말로 공연하는 첫 라이선스 작품이라는 점에서 많은 관심이 쏠렸습니다. 7월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서 개막한 뮤지컬 ‘레 미제라블’은 이전까지 국내 무대에서 볼 수 없었던 스펙터클과 높은 완성도로 관객들에게 충격을 줬습니다.

한국 공연사에 한 획을 그은 이들 작품은 올해 각각 ‘20주년’을 내걸고 공연 중이거나 무대에 오를 예정입니다. 국내 공연계에 ‘응답하라 1996’ 바람이 불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레 미제라블’은 아예 ‘응답하라 1996’이란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마케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기자 초년병 시절인 20년 전 취재하고 관람했던 기억을 살려 각 공연들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간단히 소개하고자 합니다.

오는 21일까지 서울 명동예술극장 무대에 오르는 ‘날 보러와요’ 20주년 기념 공연에서는 20년 전 이 작품으로 대학로를 뜨겁게 달군 배우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대본을 쓰고 연출한 김광림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의 ‘호출’에 류태호 이대연 권해효 김뢰하 유연수 이항나 등 원년 멤버들이 ‘응답’했습니다. 2003년 봉준호 감독, 송강호·김상경 주연의 ‘살인의 추억’으로 영화화하면서 더 유명해진 이 작품은 1986~1991년 경기 화성시 태안읍 일대에서 10차례나 발생한 끔찍한 연쇄살인 사건을 소재로 합니다.

원년 무대에 비해 훨씬 세련되고 완숙해졌습니다. 우선 국내에서 연극하기 가장 좋은 공연장으로 꼽히는 명동예술극장과 그동한 발전한 무대시설이 한몫합니다. 20년 전엔 볼 수 없던 배경 영상과 넓은 무대를 활용한 공간 연출이 그럴싸합니다. 배우들은 뱃살과 주름 등 세월의 흔적은 감출 길 없지만 한층 깊어진 공력으로 빼어난 연기를 펼칩니다. 초연 당시 ‘명배우’란 칭호를 받았던 류태호의 변화무쌍한 캐릭터 변신 연기는 예나 지금이나 ‘명불허전’입니다. 다만 원숙해지고 보다 완벽해진 만큼 원년 무대의 파닥파닥한 ‘날 것’의 에너지와 긴장감은 줄어들었습니다.

서울 한남동 블루스퀘어서 공연 중인 뮤지컬 ‘레 미제라블’은 새삼 설명할 필요가 없는 명작입니다. 빅토르 위고의 대하소설을 촘촘하게 압축해 자유, 박애, 평등의 보편적 메시지를 수준 높은 무대예술로 전달합니다. 다만 20년 전 공연에 비해선 아쉬운 점들이 있습니다. 1996년 공연은 트래버 넌 연출의 오리지널 버전이었고, 이번 무대는 2010년 로렌스 코너가 연출한 새 버전입니다. 오리지널 버전의 깊이 있고 입체적인 무대 연출을 이 작품의 최고 미덕으로 꼽는 뮤지컬 팬이라면 새 버전에 실망스러울 법합니다. ‘레 미제라블’ 의 독창적인 미학을 대표하던 회전 무대와 단순하고 현대적인 미니멀리즘식 무대가 사라졌습니다. 회전 무대를 바탕으로 단순하면서도 역동적으로 이뤄지던 장면 전환은 사실적인 무대 세트의 빈번한 드나듦과 영상 기법 등으로 대체됩니다. 오리지널에서 압권이던 명장면들의 감동이 시들해졌고 최고의 뮤지컬 명곡으로 꼽히는 에포닌의 ‘나홀로’ 장면은 안타까울 정도로 초라해졌습니다.

하지만 ‘세계를 울린 뮤지컬’이란 명성은 어디 가지 않습니다. 정성화 양준모 김우형 김준현 조정은 전나영 등 ‘세계 정상급’ 한국 배우들의 열연과 뛰어난 앙상블이 오리지널 무대의 향수를 달래줍니다. 특히 진성과 가성을 섞어가며 넓은 음역대를 소화하는 정성화(장발장)의 연기가 빼어납니다. 정성화만큼 가성에 감정의 떨림을 담는 장발장은 세계 어디서도 보기 드뭅니다. 한국 배우들의 열연이 개정판이 아닌 오리지널 버전과 만났으면 우리말로 전해지는 ‘레 미제라블’의 감동이 훨씬 더 커졌을 것이란 아쉬움은 남습니다.

전국 투어를 진행중인 뮤지컬 ‘명성황후’는 김해(20~21일), 수원(27~28일), 고양(3월11~13일), 성남(3월19~27일) 등의 공연을 남겨 두고 있습니다. LED 영상 등 첨단 무대 기술을 활용한 현대적인 연출 기법으로 드라마가 훨씬 정교하고 짜임새 있게 진행됩니다. 20년 간 갈고 닦아 ‘칼’같이 맞아떨어지는 군무는 한층 화려해졌습니다.

미국의 대표적인 쇼뮤지컬 ‘브로드웨이 42번가’는 오는 6월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무대에 오릅니다. 2014년 7월 이후 약 2년만입니다. 이 작품의 국내 무대는 ‘공연은 진화한다’는 명제를 떠올리게 합니다. 같은 제작사(CJ E&M)와 제작진, 배우들이 2009년 이후 1~2년 간격으로 되풀이해 무대에 올려 매너리즘에 빠질 법한데도 그렇지 않습니다.

매번 더 숙성된 무대를 보여줍니다. 2년 전 무대도 그랬습니다. 1996년 초연부터 여러 번 ‘42번가’를 봤던 사람도 ‘이 작품이 이렇게 속도감 있고 재미있었나’라는 생각이 들게 할 만큼 새로우면서도 완성도는 더 높아졌습니다. 몇몇 장면에서 군더더기 부분을 덜어내 템포가 빨라지고 짜임새가 촘촘해졌습니다. 올해도 CJ E&M이 2년 전과 같은 공연장에서 작품을 올립니다. 이번엔 또 얼마나 새로워지고 진화된 무대를 보여줄 지 벌써부터 기대를 갖게 합니다.(끝)/toughlb@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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