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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性속의 경제史) 두개의 사랑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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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완성은 죽음?
파괴의 미학 ‘네크로필리아’ … 일본인, 목숨 건 사랑 추구

(정화담·성풍속연구가) 여체에 대해서 너무 길게 말하다 보니 필자 자신이 염증도 난다. 여인이 매력을 갖는 것은 신체가 주는 매력만도 아니요, 사람의 사랑에는 너무도 지고 지순해 영혼을 송두리째 바치고서야 도달하는 경지가 있다.

오늘은 잠깐 우리의 토론 주제를 바꾸어 본다. 오늘 다루고자 하는 주제는 두개의 사랑에 관해서다. 여체 시리즈의 삽화같은 것일 수도 있겠다.

오랫동안 두개의 사랑이 대립해 왔다. 무슨 육체적 사랑이니 정신적 사랑이니하는 따위를 말하자는 것은 아니다. 대립하고 있는 두개의 사랑은 너무도 본질적인 것이어서 사람의 문화 역사 전통 등과도 깊은 연관을 갖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하나는 죽음에의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생명에의 사랑이다. 죽음에의 사랑이 악마적 사랑이라고 쉽사리 단정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문화의 패턴을 규정하는 것일 수도 있고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단순한 색정적 사랑일 수도 있다.

에리히 프롬은 그의 유명한 <파괴의 분석>이라는 저서를 통해 죽음에의 사랑을 갈파하고 있다. 놀랍게도 그는 죽은 사람의 시체와 필사적으로 섹스를 시도하는 여러건의 사례들을 정리하고 있다. 그는 이런 사랑에 이름을 붙여 네크로필리아 곧 죽음에의 사랑이라고 불렀다.
작명치고는 고상한 작명이라고 할수 있지만 이 엉뚱한 개념을 통해 히틀러와 나치즘을 분석해 내는 그의 식견은 탁월한 데가 있다. 나치즘은 네크로필리아의 정권이었기 때문에 전세계를 불태우고 결국은 베를린과 자기자신마저 불태운다는 게 에리히 프롬의 분석이다.

필자는 일본의 연애소설을 읽을 때마다 에리히 프롬이 창안한 네크로필리아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된다. 놀랍게도 일본의 연애소설들은 모두 참담한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대종을 이루고 있다. 유명한 미시마 유키오는 천황제의 부활을 외치며 스스로 할복을 통해 최후를 마치지만 그의 유명한 연애소설들은 모두 한결같이 죽음으로 정리되고 있다. 사랑하는 연인들이 사랑을 완성하는 방법으로 죽음을 선택한다는 기이한 논리는 지금도 일본 소설미학의 주류라고 하기에 이론이 없을 것이다. 심지어 아름다움 조차 불타오르는 파괴로 치환되는 것은 그의 너무도 유명한 <금각사>라는 소설의 주제다.

사랑에 대한 이같은 죽음의 미학은 사무라이들의 할복자살을 바람에 떨어져 흩날리는 벚꽃의 아름다움에 비견하는 일본인들의 특이한 생사관에서 유래하는 것임도 긴 설명이 필요 없다. 일본인들이 왜 이같은 죽음에의 미학을 소설미학의 정상에 올려놓았는지는 필자의 소관사항도 아니고 짧은 지식으로 정리할 문제도 아니다. 그러나 일본인들의 사랑관은 사람을 애끓게 하고 결국은 죽음에 도달케 하는 묘한 매력이 있다. 때로 그것은 애국으로 묘사되고 완전미로 묘사되는 그들만의 심미관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같은 상황은 일본인의 <에로스>라는 책을 발표한 서현섭씨가 일본의 옛 기생들조차 목숨을 거는 사랑을 가슴에 담고 있었다고 쓰고 있을 정도다. 확실히 일본 사람은 두개의 사랑중 죽음쪽에 무게를 싣고 있다.

오늘의 신문 - 2024.06.26(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