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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유의 경제위기...1998년 이건희는 뭐라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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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윤선 산업부 기자) 경제가 위기라고 합니다. 대외적으로는 미국이 금리를 인상하는 와중에 중국의 위안화 통화절하는 계속될 것 같습니다. 대내적으로는 이렇다할 기업들의 경쟁력 향상 성과가 보이지 않는 와중에, 대우조선해양이나 삼성엔지니어링 같은 전형적인 ‘관리실패’ 사례도 나옵니다. 물론 정치도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전문가들과 사회 원로들 사이에서는 위기 자체보다는 위기에 대응하는 우리의 자세가 더 문제라는 지적도 나옵니다. 이제 겨우 한국 제품을 베끼기 시작한 중국을 두고도 “큰일났다”며 호들갑을 떨 뿐, 어떻게 이들을 이길지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적다는 겁니다. 기업에서도 심지어 신입사원까지 포함시키는 구조조정만 잇따를 뿐, 당차게 방향을 제시하는 리더를 찾아보기 힘든 듯 합니다.

그러던 중 이건희 삼성 회장의 1998년 신년사를 접하게 됐습니다. 지금보다 더 큰 위기인 IMF를 맞이하던 한 기업인의 고뇌가 담겨있습니다. 하지만 고뇌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위기를 극복해 내겠다는 결연한 의지와 그에 따른 계획도 포함돼 있습니다. 그리고 IMF 이후 이 회장과 삼성이 그 의지를 실천해 냈다는 건 역사가 증명합니다. 여러번 읽으며 어떻게 기사로 옮길지를 고민하다가 그냥 원문을 적습니다. 시제만 조금 바꾸면 지금 시대에도 거의 그대로 적용할 만 합니다.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적은 바로 자포자기하는 정신적 패배주의입니다”라는 말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한번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1998년 신년사, 이건희 삼성 회장

저는 오늘 이루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과 참담한 마음으로
무인년 새해 아침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역사는 지금 우리 모두의 무지와 자만 그리고 안일함을 준엄하게 꾸짖고 있습니다.
우리는 엔고 호황의 착각 속에서 세계의 흐름을 억지로 외면해 온
우물 안의 개구리였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제 뼈저린 자기 반성 없이 새 출발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실물경제의 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기업인의 한 사람으로서
오늘의 경제파탄에 대해 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충분히 다하지 못했음을 후회하고 있습니다.
사회 전체가 국민 소득 1만 불의 허상 속에서 흥청거리는 동안,
우리의 소중한 자산인 근로윤리와 근검절약 정신은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기업 스스로 내실 보다는 겉모양을 갖추는데 신경을 쓰고, 체질을 강화하기 보다는,
분에 넘치는 몸 불리기에 열중하지는 않았는지 겸허히 반성해야 합니다.
허리 끈을 졸라 매면서 풍요로운 내일을 준비하기 보다는 오늘의 내 몫 찾기에만 급급해 온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부끄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사상초유의 위기적 경영여건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IMF로 비롯되는 신질서 형성의 소용돌이 속에서 기업에게는 생존 그 자체가 절박한 과제입니다.
고금리와 저성장의 경제 틀 안에서 우리가 감내해야 할 경영 압박과 고통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기업도 이제는 양적 사고의 구시대적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야만 합니다.
뼈를 깎는 혁신으로 경영체질과 경쟁력을 강화시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변화 불감증에 걸려 구태의연한 자세로 경영해 온 일부 대기업의 도산은 우리 경제에
큰 충격과 혼란을 주었습니다만 우리에겐「변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와
「살아 남은 자 만이 미래를 말할 수 있다」는 값진 교훈을 주었습니다.

기업의 생존이나 멸망을 결정짓는 것은 복잡한 경영이론이 아니라 경쟁력입니다.
말이 아니라 행동력입니다.

훌륭한 기업일수록 자신의 생존과 미래가 걸린 중대한 일은 결코 남에게 맡기지 않습니다.
단호한 결단, 단결된 힘으로 오늘의 아픔을 내일의 축복으로 승화시켜 나가는 저력을 발휘합시다.

이러한 기업이 곧 초일류 기업인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자신감이 오늘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희망입니다.
패배 그 자체 보다는 패배의식이 더 무서운 법입니다.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적은 바로 자포자기하는 정신적 패배주의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우리의 기량과 저력을 한껏 펼쳐 나갑시다.

우리부터 흐트러졌던 자세를 다시 가다듬고 「나라가 없으면 회사가 없고,
회사가 없으면 내 자신이 없다」는 결연한 각오로 허리끈을 졸라 매고 고통분담을 솔선해 나갑시다.

바람이 강하게 불수록 연은 더 높게 뜰 수 있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위기를 도약의 계기로,
불황을 체질강화의 디딤돌로 삼을 수 있는 땀과 희생, 그리고 용기와 지혜입니다.

이제 더 이상 머뭇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대담하게 버릴 것은 버리고, 합칠 것은 합쳐 나가는 구조조정을 단행해 나갑시다.
고비용 저효율의 악순환 고리를 끊고 낭비와 거품을 철저히 걷어 내도록 합시다.
앞으로 각 관계사는 「자주」, 「자립」이라는 경영관점에서 홀로 서는 책임경영을
실천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 앞에는 우리의 능력과 인내를 시험하는 힘겨운 시련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떠한 희생과 고통이 있더라도 여기서 주저 앉을 수는 없습니다.
삼성에 대한 국민적 기대를 우리는 결코 져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후배들에게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한 자랑스러운 선배로 기억될 수 있도록
「또 다른 삼성 60년」의 역사를 향해 힘차게 전진합시다.

임직원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건강과 행운이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끝) /inkling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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