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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 사무총장이 사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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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이심기 특파원) 새벽 3시57분. 요란한 알람소리에 벌떡 일어난다. 양복을 입고 잠든 그는 옷을 갈아입을 필요도 없이 허겁지겁 사무실로 출근한다. 곧이어 산더미처럼 밀려드는 서류. 형광펜으로 줄을 그으며 읽어대지만 쏟아지는 서류는 수북히 쌓여만 간다. 장시간 여행에도 그는 서류를 놓을 수가 없다. 짧은 식사시간에 난기류를 만나 비행기가 흔들리면서 식판이 춤을 춘다.

다른 비행 스케줄에 쫓겨 허겁지겁 공항에 들어서는 순간에도,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볼 때도 문 아래로 결제서류가 들어온다. 빈틈을 비집고 수시로 밀려드는 회의와 브리핑도 살인적인 일정에 한 몫한다. 사진 촬영과 면담으로 식사는 거르기 일쑤다.

새벽 1시04분. 잠자리에 드는 순간에도 비서는 읽어야 하는 서류더미를 건넨다. 침대에 누운 뒤 한시간 반가량이 지난 새벽 2시36분. 비서가 비상상황이라며 전화기를 건넨다. 통화를 끝내고 다시 잠을 청하자 마자 새벽 3시57분. 다시 “굿모닝”이라는 알람소리가 그를 깨운다.

윗 글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반기문 사무총장이다. 반 총장은 자신의 일상을 담은 코믹스러운 영상을 선보였다. 제목은 ‘유엔 사무총장이 되는 법(how to be a secretary general)’. 14일(현지시간) 뉴욕 맨해튼 월스트리트의 한 식당에서 열린 유엔출입기자단(UNCA) 송년 만찬 자리에서다. 매년 열리는 이 자리에서는 사무총장이 직접 출연하는 영상을 공개하는 것이 관례다.

올해 동영상은 임기 1년을 앞둔 반 총장의 일상을 코믹하게 다뤘다. 반 총장은 영상을 소개하며 “사무총장의 실제 생활을 보여주겠다”고 말했다. 자신이 분초를 아껴가며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다. 실제 유엔사무총장 앞에는 ‘미션 임파서블(mission impossible)’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반 총장은 동영상이 끝난 뒤 “이런데도 사무총장을 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고 뼈있는 농담을 날렸다. 그는 “차기 총장의 조건과 자격, 선출방법 등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나오고 있다”며 “하지만 마침내 여성 사무총장이 나와야 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말해 좌중의 박수를 받았다.

반 총장은 차기 총장 선임과 관련해 “내가 최고의 적임자를 찾을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을 고안해냈다”며 “완전한 검증이 가능하도록 모든 과정을 공개하는 것”이라며 인기있는 TV 게임쇼를 통해 후보를 선발하는 영상을 공개해 좌중의 폭소를 자아냈다. 반 총장은 “마지막 라운드로 후보들을 세상에서 가장 살벌한 장소로 데려갈 것”이라며 “그 곳은 정글도, 전쟁터도 아닌 바로 유엔 브리핑실”이라고 조크했다.

영상은 유엔 사무총장이 되기 위해서는 전 세계 모든 국가의 상황과 모든 국제적 이슈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하며 언제든지 기자들의 질문에 거침없이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심사위원의 발언을 소개했다. 영상에 출연한 후보자들은 유엔 기자단의 잇따른 질문에 쩔쩔매고 나가떨어지거나 질문을 피해 자리 밑으로 숨기까지 했다. 반 총장은 “사무총장직의 가장 어려운 부분은 차별, 빈곤, 불평등, 폭력 등 지구촌의 많은 위기에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라며 “나는 기적을 만들지는 못했지만 분초를 아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날 연설을 “기후변화협약의 성공적인 체결로 유엔이 더 이상 비효율적이라는 비판을 듣지 않게 됐다”는 말로 시작했다. 최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를 거론하며 “유엔 역사상 처음으로 모든 회원국이 참여하는 야심찬 목표에 도달했다”고 재차 강조했다. 그동안 사무총장을 연임하면서도 뚜렷한 업적이 없다는 비판을 털어냈다는 홀가분함이 느껴지는 말투였다. 이날 행사에는 유엔 출입기자들과 각 국 유엔대표부 대사 부부 등 700여 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끝) /sg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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