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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리는 겨울밤 읽을만한 책...성석제의 일곱 번째 산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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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익 문화스포츠부 기자) 소설가 성석제 씨는 특유의 입담으로 많은 팬을 보유하고 있는 작가입니다. 그는 소설뿐만 아니라 에세이도 자주 쓰고 있습니다. 이번에 일곱 번째 산문집 '꾸들꾸들 물고기 씨, 어딜 가시나'(한겨레출판)가 출간됐습니다.

2006년에 나온 성 작가의 음식 에세이 '소풍'(창비)과 소설가 김훈 씨의 '바다의 기별'(생각의나무)을 가장 좋아하는 산문집으로 꼽는 저는 이번 에세이집을 반갑게 펼쳤습니다.

새 산문집은 여행, 장소, 시간, 음식, 그리고 사람에 대한 글을 담고 있습니다. 맨 처음 실린 ‘봄의 화인’은 작가의 친구였던 고 기형도 시인(1960~1989)과의 추억이 들어 있습니다.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 많은 이들에게 슬픈 기억으로 남아 있는 고인이지만 작가는 그래도 그와 함께했던 즐거운 추억을 꺼냅니다. 대학생이었던 기형도는 박두진 선생(1916~1998)에게 시를 보여드리고 싶은데 떨려서 혼자 못 가겠다며 친구 성석제를 끌고 갑니다. 대충 낙서를 끄적여 들고 갔던 미래의 소설가는 선생에게 깔끔하게 무시당하고, 미래의 시인은 당대의 시인과 뜨거운 이야기를 나누는 풍경이 재미있게 그려집니다.

“그가 기형도에게 손짓을 했다. 서로 엇갈리면서 보니 기형도는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다. 기형도는 그의 앞에서 검은 비닐 가방을 열고 정성스럽게 원고지에 한 자 한 자 연필로 눌러쓴 시를 세 편 꺼냈다. 은거한 고수인지 고승인지는 나를 대할 때와는 태도가 사뭇 달랐다. 그는 원고지를 천천히 넘겨가며 시를 읽고 나서 뭔가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무슨 말인지 들으려고 나도 모르게 몸이 살짝 기울어졌는데 그걸 눈치챈 그는 더욱 목소리를 낮추고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서로 맞닿을 듯 좁혔다.(...)이야기를 마치고 나온 기형도의 얼굴은 술 취한 사람처럼 붉었고 입에서는 단내가 풀풀 났다. 그는 술을 한 잔도 못 마시는 체질이었음에도.” (‘봄의 화인’ 중)

조선 시대 선비가 조랑말을 타고 500리 길을 갔을 때 걸린 시간을 알아보겠다며 12만원짜리 자전거로 ‘국토 종주’를 시도한 일. 거기서 개통 전 아무도 없는 중부내륙고속도로를 자전거로 질주한 이야기(‘앵두길 500리, 오디를 따라가다’)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작가의 입담은 정말 당해낼 수가 없습니다.

성석제 산문이 매력 있는 이유는 이렇게 ‘재밌는 이야기’라는 본질을 놓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한번은 겪었을 법한 일들, 누구도 겪지 못했을 신비한 이야기들을 능청스럽게 풀어냅니다. 여행지에서 겪은 일, 먹을거리에 얽힌 인생의 맛은 어느 소설이나 영화보다 더 큰 재미를 선사합니다. 눈 내리는 겨울밤, 따뜻한 방에 어울리는 이야기를 찾는 독자들이라면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끝) /dir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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