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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장에 모인 동국제강 임원들의 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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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라 산업부 기자) 지난 19일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425호. 이곳에선 회삿돈을 빼돌려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상습 도박을 한 혐의 등으로 구속 기소된 장세주 동국제강 회장의 1심 판결이 있었습니다. 공판은 오후 2시에 시작인데도 법정 앞은 1시부터 북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전현직 동국제강 임원, 계열사 관계자 수십 명이 모두 모였기 때문입니다. 남윤영 전 동국제강 사장(현 고문), 홍순철 전 유니온스틸 사장, 남영준 국제종합기계 사장 등은 물론 나이 지긋한 선대 회장의 지인들까지 발걸음을 했습니다. 서로 약속이나 한듯 한 자리에 모인 이들은 서로 '오랜만이다'는 인사를 건네기 무섭게 착잡한 얼굴로 회한의 말들을 쏟아냈습니다.

한 전직 임원은 "(장세주 회장이) 어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엄하게 밥상머리 교육 받는 걸 지켜봤는데, 검찰은 한낮 놀음꾼으로 몰아 60년 기업 명예를 바닥까지 떨어뜨렸다"고 했습니다. 또 다른 임원은 "정이 너무 많은 사람이라 (계열사 등) 어려워지는 거 못 봐서 늘 주변을 두루 도와주곤 했다"며 "이번에 검찰이 특혜 시비를 건 국제종합기계 지원은 지금 산업은행조차 워크아웃 모범사례로 떠들고 다니는 건인데 칭찬 받을 일이 범죄가 되어버렸다"고 했습니다.

법정이 열리자 푸른색 수의에 흰 운동화를 신은 장 회장이 들어섰고, 법정 안은 침묵했습니다. 판사가 판결문을 읽자 두 손을 모으고 듣는 사람, 열심히 메모를 해가며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 안도의 한숨을 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12건의 공소 내용 중 7건이 무죄 또는 일부 무죄, 공소 기각 등의 판결을 받았습니다. 특히 쟁점이 됐던 상습도박 혐의에 대해서는 "판돈이나 규모, 도박 지속 시간 등 상습성을 인정할 증거가 제출되지 않았고, 공소시효가 만료된 건도 있었다"며 무죄 판결이 나왔습니다. 2010년과 2013년 두 차례 카지노에 간 것에 대해서는 단순 도박만 인정됐습니다.

다만 자투리 철을 판매한 대금 88억5600만원을 무자료 거래한 점, 미국 법인의 계좌를 통해 아들의 뉴욕 아파트 임대료와 가공급여를 지급한 점, 처남을 도와주기 위해 회사가 필요 없는 자금을 차용하고 이자를 지급하는 방식으로 3억여원의 손해를 끼친 점 등은 유죄로 인정됐습니다. 재판부는 횡령 배임으로 회사가 입은 손해가 127억원에 달한다며 징역 3년 6개월의 실형, 벌금 1000만원, 추징금 5억1000만원을 선고했습니다.

방청석의 지인들을 차마 쳐다보지 못한 채 고개를 푹 숙이고 법정에 들어선 장 회장은 판결문이 끝날 때까지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특히 판사가 판결 말미에 "1954년 설립 이래 우리 경제 발전에 공헌해온 동국제강 그룹을 지지하는 임직원 및 국민이 신뢰를 저버린 행위이고, 우리나라 대표 기업 총수로서 투명하고 합리적인 경영을 해야할 사회적 책임과 역할을 저버린 것"이라고 꾸짖자 그의 어깨가 떨리기도 했습니다.

장 회장은 선고 공판 전 최후 변론 당시 "어려서부터 집에서 아버지가 철사 만드는 것만 보며 자라서, 나는 오로지 철을 만들어 나라를 지키는 게 나의 소명인 줄 알고 자랐다"며 "유죄로 인정한 부분들에 대해 깊이 뉘우치고 반성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탄원서를 내는 직원들에게는 "혹여나 억지로 그런 것 하지 말아달라"고 당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할아버지인 장경호 창업주, 2대 회장이었던 아버지 장상태 회장께 부끄럽다고 토로했다고 합니다.

동국제강은 1954년 서울 당산동에서 못과 철사를 만드는 회사로 시작해 국내 최초로 선박에 쓰이는 후판을 만든 곳입니다. 현재 국내 3위 철강회사이자 세계 5위 후판 회사입니다. 특히 장상태 회장은 철강업계 대부로 통하는 엘리트 경영인이었습니다. 1956년 선친의 회사에 입사해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시작했고, 2000년 4월 타계할 때까지 오직 철강 한우물만 파온 인물입니다. 장세주 회장도 1978년 신입사원으로 입사해 예산과, 인천공장 제강과 대리, 본사 회계과장, 일본지사 차장, 인천공장장, 영업본부장, 기획실장 등 전 부서를 두루 거쳐 1999년 사장직에 올랐습니다.

물론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는 게 마땅합니다. 하지만 회사 직원들의 분위기는 조금 다릅니다. 공판장에 모인 이들은 "오너 일가라고 한 치의 꾀부림도 없었고, 직원들을 하대하는 일도 없었다"며 "덕망 높은 경영인이 대를 이어 60년을 경영하니 20년 무파업도 가능한 것 아니었겠냐"고 했습니다. 또 "장 회장이 횡령, 배임한 금액도 30억원 가량은 직원 격려금으로 쓰였고, 나머지는 대부분 변제된 금액"이라며 "3년 이상의 실형은 너무 과한 것 같아 유감스럽다"고도 했습니다.

장세주 회장 못지않게 어깨가 무거운 사람은 동생 장세욱 부회장입니다. 형의 구속 수사가 길어지면서 단독 대표 체제로 전환해 경영 전면에 나섰지만, 철강 시황은 살아날 기미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올해 서울 을지로 본사 페럼타워까지 팔아 유동성을 확보했지만, 앞은 여전히 깜깜합니다. 여기에 10년 넘게 장세주 회장이 추진해온 브라질 제철소 사업마저 삐걱대고 있습니다. 장 부회장은 공판이 끝난 뒤 “아쉽지만, 남은 사람들이 열심히 뛰는 것밖에 방법이 없지 않겠냐”며 자리를 떠났습니다.

동국제강 전현직 임원들은 공판이 끝나고도 한 동안 법원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60년 세월이, 세상이 참 야속하기만 하다”고 하면서요. (끝) /destinyb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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