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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서 한지제조법 계승하는 재미교포 한지예술가 에이미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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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이심기 특파원) “따뜻한 날씨에서 자란 나무에는 ‘힘’이 없습니다. 추운 겨울을 거친 닥나무로 만들어야 종이 질이 좋거든요.”

재미교포 한지예술가 에이미 리는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 있는 자신의 작업실 바깥에서 한지의 재료가 되는 닥나무를 직접 키우고 있다. 천연 염색재료로 직접 재배하면서 한국의 전통방식을 고집하고 있다. 그가 작업실을 미국 남부가 아닌 중서부의 클리블랜드로 정한 이유중 하나도 한국과 비슷한 환경에서 종이를 만들기 위해서다.

그가 한지에 빠진 계기는 2003년 대학서 종이를 만드는 수업을 들으면서부터다. 종이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한국 전통문화의 기반이 된 한지를 발견했고, 자신의 정체성까지 깨닫게 됐다. 하지만 중국서 한국을 거쳐 일본으로 건너간 한지를 정작 미국서는 찾을 수가 없었다.

“전통 한지의 수명은 1000년을 갑니다. 현대식 종이의 100년에 비할 바가 아니죠. 한지의 역사와 우수성을 알리고 싶었는데 종이는 구하기 어렵고 영어로 된 자료는 없고 정말 답답했죠.”

그는 한지를 직접 만들기로 결심하고, 미국정부가 주는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아 직접 한국으로 건너왔다.

“6개월간 장지방을 돌면서 한지 만드는 방법을 배우겠다고 장인 선생님을 쫓아다녔는데 다 거절당했죠. 결혼도 안한 재미교포, 그것도 여자가 한지를 만들겠다고 하니 이상하게 본거죠.”

다행히 경기도 가평의 장지방에서 한국 고유의 전통 초지법인 외발뜨기를 배울 수 있었다. 6개월간 모텔에서 묵으면서 매일 장지방을 걸어다녔다. 영하의 1월 날씨에 닥나무 껍질을 벗기면서 손이 부르트기도 했다. 그렇게 한지와 천연염색를 하는 방법을 깨친 그는 내침김에 서예까지 배우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뒤 본격적인 한지 알리기에 나섰다. 2012년에는 한지의 역사와 제조법을 담긴 책을 처음으로 영어로 내기도 했다. 한국 정부가 하지 못한 일을 젊은 재미교포가 해낸 것이다.

1980년 전국에 200곳이 넘게 있던 한지공장은 지금 25곳으로 쪼그라들었다. 그나마 한지제조법을 전파할 수 있는 무형문화재, 즉 장인들은 모두 70세 이상이다. 젊은 후계자들은 한국에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에이미 리가 한지의 전파자 역할을 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한지를 문화가 아닌 상품으로 보존할 가치가 있을까.

“한지는 도서관이나 박물관에서 과거 기록물을 복원하는 용지에서 벗어나 첨단소재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수천만원대 고가 스피커의 울림판은 한지 섬유로 만들 때 가장 원음에 가까운 소리를 냅니다.”

뿐만 아니라 소형 로봇 등 첨단기기에서도 한지가 활용된다. 천연 셀룰로우스 섬유에 전극을 가하면 진동을 하는 특성이 있어, 소형카메라를 장착한 첩보로봇 등을 제작할 때 한지를 사용하면 소리를 거의 내지 않는 잠자리 날개처럼 운반체를 만들 수 있다. 인테리어 상품이나 친환경 생활용품의 재료로도 각광받고있다. 프랑스의 패션업체는 한지를 패션의류에 활용한지 오래다.

한지에 옻칠을 더하면 방수기능을 갖춘 의류 소재나 그릇으로도 활용이 가능하다. 디지털 프린팅 기술과 접목하면 문화제 복제품을 거의 원형과 똑같이 제작할 수 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 유산에 등재된 한국의 기록물 유산 11건 중 훈민정음해례본, 조선왕조실록 등 9건이 한지를 재료로 한 것이다. 그만큼 내구성과 보존성이 우수하다. 하지만 정작 한지는 등재를 못하고 있다. 일본 화지는 2009년과 2014년에 걸쳐 세계문화유산 무형문화재로 등재를 했고, 2가지 종류의 종이까지 등록돼 있다. 외발뜨기라는 일본 화지와 중국 선지와는 다른 우리나라 고유의 초지기술을 갖고 있지만 아직 세계적인 유산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이미 아시아의 전통종이는 한지나 중국의 선지가 아닌 일본의 화지(和紙)가 대표 상품으로 자리를 굳힌지 꽤 됐다.

“일본은 오래전부터 화지와 관련된 세미나와 전시회를 통해 홍보를 꾸준히 해오고 있습니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수록지하면 화지 밖에 없는 줄 압니다. 늦었지만 한국에도 독자적인 초지기술이 있다는 것을 꾸준히 알려야 합니다.”

한국에서 한지 장인이 사라지면 일본 종이를 사다 쓸 수 밖에 없다. 문화의 기록은 종이를 통해 가능하다. 종이를 수입하는 것은 정신을 잃는 것이다. 어려운 환경이지만, 기술을 보존, 전승하고, 해외에 알려서 한국의 초지기술이 더 뛰어나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는 게 에이미 리의 지적이다.

게다가 미국서 제대로 된 한지를 파는 곳은 뉴욕 한 군데 밖에 없다. 가격도 일본 화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싸다. 한지는 통상 63×93 사이즈로 팔리는데 가격은 장당 20달러. 일본 화지는 이보다 조금 작은 크기지만 한 장에 3달러에 불과하다.

“전문작가가 아니면 일본화지를 쓸 수 밖에 없는 시장구조입니다. 고급화 전략과 함께 싸게 대량으로 한지를 해외에 공급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끝) /sg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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