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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위기관리, 완벽주의는 던져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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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커뮤니케이션④-신속성과 정확성 딜레마


'기업 커뮤니케이션' 시리즈 ④ - 신속성과 정확성 딜레마

(유하늘 디지털전략부 기자) 당신은 조그마한 시골 마을의 유치원 교사다. 어느 날 갑자기 소아 성추행범으로 몰려 온 동네에 소문이 났다. 식료품을 사러 마트에 갔더니 "당신에겐 물건을 팔지 않겠다"며 주먹질을 한 뒤 내쫓는다. 거리에 나가면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며 수군댄다. 마을 주민은 당신을 같은 동네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 모양새다.

여론에 의한 마녀사냥을 다룬 영화 '더 헌트'(원제 'Jagten'·2013년 한국 개봉)의 주인공 루카스 얘기다.

루카스가 일하는 유치원엔 절친 테오의 딸 클라라가 다닌다. 클라라는 멋진 남자 선생님 루카스에게 원초적 호감을 느낀다. 하지만 관심을 받아주지 않는 그에게 서운함을 느껴 유치원 원장에게 "루카스가 날 성추행했다"는 거짓말을 한다. '아이는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진 원장은 루카스가 성추행범이라는 여론을 형성해 그를 큰 곤경에 빠뜨린다.

영화는 여론이 굳건히 '진실'이라고 믿는 것이 사실은 허상일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루카스를 의심하는 주민만을 탓할 수는 없다. 그들은 일차원적이고 파편적인 정보만 받았기 때문이다.

감독의 연출은 루카스의 아픔과 억울함을 강조하지만, 책임은 루카스 본인에게도 있다. 그는 사건의 당사자들(클라라의 아버지인 친구 테오, 유치원 원장)과 대화를 시도하지만 다른 이들과는 소통하거나 해명하지 않았다. 나중에 공식적인 판단(경찰 등 행정당국의 결정)에 따라 무고함이 밝혀지지만 그의 명예는 이미 훼손된 뒤였다. 위기 대응 실패다.

▲ 위기대응 '신속성'의 중요함을 보여주는 사례...파리바게뜨와 블랙야크

기업 역시 허위정보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부정적 여론의 형성, 이에 따른 명예 실추 위기에 항상 직면해 있다. 기업 명성관리 전문기업 에스코토스의 강함수 대표 등 위기관리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위기가 발생할 경우 신속한 대응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파리바게뜨 '쥐 식빵 사건'은 신속한 대처가 효과적으로 작용한 사례다.

2010년 12월 23일 새벽 1시 45분께 파리바게뜨 식빵에 쥐 시체가 들어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진이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를 통해 퍼졌다. 파리바게뜨는 같은 날 오전 대책회의에 들어갔다. 관련 부서와 기술진이 대책회의를 열고 사실확인에 착수했다.

디시인사이드에 사진이 올라간 지 약 12시간 만인 당일 오후 2시. 파리바게뜨는 기자회견을 열어 빵 제조과정을 직접 시연했다. 기자회견엔 보통 1주일 이상 준비기간이 걸린다는 점을 고려하면 빠른 대처였다. 쥐를 대신해 돼지고기를 반죽에 넣고 오븐에 굽는 과정을 언론에 직접 보여줬다. 이로써 제보 사진이 거짓임을 카메라 앞에서 증명했다.

기자회견 뒤 '쥐가 나온 건 허위 제보인 것 같다'는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경찰 조사 결과 같은 동네서 경쟁업체를 운영하는 제보자의 자작극이었다. 파리바게뜨는 기민한 대처 덕분에 누명을 쓸 위험에서 벗어난 셈이다.



블랙야크 역시 빠른 의사결정 덕을 봤다. 2013년 9월 30일 여러 언론은 항공업계 관계자를 인용해 '같은 달 27일 오후 3시께 김포공항 한 탑승구에서 승객이 항공사 직원을 폭행했다'고 보도했다. 몇 시간 뒤 가해자는 블랙야크 강태선 회장으로 밝혀졌다. 탑승구에 늦게 도착한 강 회장은 출발시간 지연 문제로 탑승을 거부하는 항공사 용역직원의 얼굴을 신문지로 때린 것으로 알려졌다.

관련 보도가 나오자 강 회장은 공식 입장을 언론에 제공하고, 개인 블로그에도 게시했다. 현장에서 당사자에게 사과하고, 약 1시간 후 다시 찾아가 진심으로 사과했다는 내용이었다.

강 회장의 폭행은 어떤 이유에서든 정당화할 수 없다. 다만 대한항공 '땅콩 회항' 사례와 비교해보면, 오너 본인이 유발한 문제를 빠르고 단호하게 처리했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개인적인 잘못을 가지고 회사 명의로 사과문을 내거나, 피해자를 방치한 채 제3자인 언론에만 사과하지 않았다는 것도 의미가 있다.

▲ 알고도 실패하는 건 '정보 공백 현상' 때문

파리바게뜨 같은 모범사례를 자주 찾긴 힘들다. 기업들은 빠른 대처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위기 초동대응에 실패하곤 한다. 이는 '정보 공백 현상' 때문이다.

정보 공백 현상은 위기 초기에 정보 부족 때문에 진실을 알기도 힘들고, 따라서 입장을 정하기 힘든 상황에 빠지는 걸 말한다. 이렇게 경영진이 상황파악 때까지 판단을 미루는 사이,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부정적 정보가 여론을 잠식한다.

정보 공백 때문에 발생한 위기는 사람들에게 잘 변하지 않는 강한 인상을 남긴다. 기업이 나중에 발표한 해명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파급력이 크지 않게 된다.

결국, 위기관리에서 '최초 대응'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최초 대응은 공중의 위기에 대한 첫 인상을 결정하며, 첫 인상은 위기가 진행되는 동안 지속적으로 유지되기 때문이다.

▲ 기업이 신속한 대응 못 하는 구조적 이유

정보 공백과 같은 현상은 왜 발생하는 걸까. 기업이 위기에 신속 대응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원인을 살펴보자.

첫째 원인은 위기대응 훈련 부족이다. 기업별로 위기 종류는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지만, 위기 발생 타이밍은 예측하기 어렵다. 따라서 위기관리 매뉴얼, 위기 시뮬레이션 훈련, 미디어 트레이닝 등을 통해 평소에 준비한다 쳐도 준비한 것처럼 위기에 완벽히 대응하긴 쉽지 않다. 위기 대처 준비를 하지 않았던 기업은 말할 것도 없다.

둘째, 위기관리 지도력 부재다. 위기가 발생하면 이해관계자들은 기업의 공식 견해를 듣고 싶어한다. 하지만 기업 역시 정보가 충분치 않은 상황에서 입장을 발표하길 꺼릴 수밖에 없다.

수많은 정보가 현장에서 올라오지만, 부서마다 이에 대한 의견과 해석이 분분해서 위기에 알맞은 의사결정을 내리기 어렵다. 의사결정 주체인 리더(CEO나 임원)들 간에도 '왜 위기상황을 키우느냐', '법적으로 우리가 책임을 다 져야 할 수도 있다'며 논쟁이 벌어지며 시간 지연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현상을 파악하고 각 부서 간 갈등을 조율하고 신속히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리더십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

셋째, 협업의 부재다. 부서 간 소통의 부재가 신속한 의사결정을 방해한다. 법무, 기획, 영업, 마케팅 등 각각의 위치에서 동일한 위기에 대해 자기들만의 대응 계획을 세우다 보면 의견일치가 어렵다.

권위적인 보고체계는 협업을 방해한다. 규모가 큰 회사일수록 복잡한 의사결정 체계를 가진 경우가 많다. 위기 상황에서는 최고 의사결정자에게 신속하게 정보보고가 돼야 하는데, 권위적 시스템과 복잡한 보고 과정이 보고 속도를 늦춘다.

실무자와 층층이 있는 리더들간의 커뮤니케이션,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잘 정리된 보고서를 원하는 팀 리더들의 영향으로 많은 시간이 지나게 된다. 최고 의사결정자에게 보고됐을 때는 이미 언론이나 외부를 통해 정보를 알게 된 후일 것이다.

이외에 위기 자체를 감지하지 못하거나, 위기를 위기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경우 또는 의사결정은 빨랐지만 실행에 많은 시간을 허비해 빠른 대응에 실패하기도 한다.

▲ 위기대응 '골든 타임'에 해야 할 일

위기 발생 후 24시간 동안 기업이 할 일은 무엇일까. 우선 피해자에 대한 조치(의료 및 안전조치)에 서둘러야 한다. 피해 원인을 제거하고 확산과 재발 방지 노력도 함께해야 한다.

둘째, 메시지 단일화 및 내부 관리다. 위기 발생시 미디어는 집착적으로 부정적인 정보 수집에 힘쓴다. 부정적 정보가 긍정적 정보보다 많은 사람들의 흥미를 끌어서다.

이 때 부정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가장 큰 정보원은 내부 직원이다. 직접 유출할 수도 있지만, 기자와의 간단한 전화통화나 무심코 던진 발언 하나가 미디어에 의해 기업 전체의 의견으로 표현돼 기업 이미지에 타격을 미칠 수 있다.

결국 위기 발생 시 가장 먼저 케어하고 한 목소리를 내야 할 이해관계자는 다름아닌 내부 직원들이다. 지도부는 위기 극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여 불필요한 정부가 외부로 새어 나가는 것을 막아야 한다.

셋째, 정보 통제다. 주의할 게 있다면, 정보 통제는 '은폐'와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기자들에게 취재 가이드를 제시하고 매 시간마다 사건 상황을 브리핑(정보 공유 및 기업의 입장 표명 등)하는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 위기 상황을 지배하고 안정시켜 나가고 있다는 이미지를 전달하기 위해서다. 브리핑은 위기 정도에 따라 CEO 또는 훈련받은 대변인이 할 수 있다.

넷째, 공식적인 입장 표명이다. 위기 발생 후 첫 입장 표명시엔 사실관계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상태일 확률이 높다. 자칫 사실을 부인하거나 감정적으로 대응할 수 있으니 주의하자.

현재 상황을 가능한 간결하게 전달하고, 은폐하려는 인상을 주지 않아야 한다. 확인된 내용 중에 사실은 사실임을, 확실하지 않은 건 확실하지 않음을 밝히는 것 자체도 중요한 정보다. 이때 위기 해결을 위해 기업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구체적인 조치를 말해주는 것이 좋다.

새로운 정보가 들어 올 때마다, 혹은 일정 간격마다 브리핑 자리를 만들면 신뢰도를 높일 수 있다. 구체적인 수치가 담긴 자료를 함께 전달하면 효과는 높아진다.

▲ '신속성 vs 정확성' 딜레마 ... 무엇이 우선?

신속한 대응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도, 정보가 부족한 상황에서 입장을 밝히기는 조심스러운게 사실이다. '신속성'과 '정확성'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어느 쪽을 중시해야 할까.



위기관리·홍보 전문가인 유재웅 교수(을지대 의료홍보디자인학과)는 "위기관리 전문가들은 공통적으로 '신속성'을 우선시한다"고 말했다.

이는 위기발생 초기에 정확한 대응을 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사안에 따라 육하원칙에 따른 기본적 사실을 파악하기 힘든 경우도 있다. 세월호 사건 발생 초기 피해상황 발표가 여러 차례 번복됐던 것처럼 말이다.

결국 위기를 완전히 장악하겠다는 욕심을 내려놓는 게 중요하다. 완벽주의적으로 접근하면 오히려 제대로 대응할 수 없다는게 유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부정확한 정보가 나오면 최대한 빨리 바로잡으면 된다. 첫 대응이 늦으면 공연한 오해를 사거나 은폐 의혹이 나올 수도 있다. 반면 대응속도가 빠르면 상황을 주도적으로 끌고 갈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기업 명성관리 전문기업 에스코토스의 강함수 대표 역시 재빠른 상황 통제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의사결정에 앞서 기업의 태도를 명확히 하는 게 우선이라는 것이다.

강 대표는 기업 차원의 공식 입장을 전하기 힘든 상황이라면 △ 기업이 해당 사건에 대해서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는 점 △ 이를 중요하게 다룰 것이라는 점 △ 정보를 공개하고 투명하게 대응할 것이라는 점을 밝히는 게 오해가 발생할 여지를 없애는 데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영화 '더 헌트'의 주인공 루카스는 개인에 불과했다. 위기관리 의지가 있었어도 현실적 장벽 때문에 좌절했을 수 있다. 하지만 기업은 다르다. 위기에 체계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조직과 채널이 있다. 법은 무죄추정의 원칙을 따르지만, 여론은 유죄추정의 원칙이 적용된다는 점을 인지하고 재빨리 대응해야 한다. 대중은 침묵을 '무언의 긍정'으로 받아들일 뿐이다. (끝) /skyu@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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