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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역 기법으로 강력범죄 잡은 콜롬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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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학 박사 출신의 칼리 시장, 데이터 기반 처방으로 범죄율 ‘뚝’

(정우성 포스텍 산업경영공학과 교수) 한국은 전 세계적으로 봤을 때 비교적 안전한 국가로 꼽힌다. 크고 작은 범죄가 일어나고 있다고는 하지만 총기가 광범위하게 퍼져 유혈이 낭자한 살인극이 일상화된 나라에 비하면 강도가 낮다.

이와 대조적으로 국민들이 항상 언제 비명횡사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떨고 있는 나라들도 있다. 오늘날 대규모 난민 사태를 빚고 있는 시리아 같은 내전 지역이 아니면서도 말이다. 대표적인 국가들이 여러 중남미 국가들이다.

중남미 국가들에서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는 통계만 봐도 알 수 있다. 일례로 어떤 사람이 개인들 사이의 총칼이 동원된 흉악 범죄로 사망 또는 장애를 겪게 될 확률을 보자. 2010년 기준으로 한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발전된 국가들은 확률이 1% 미만이지만 엘살바도르는 무려 13.3%이고 콜롬비아는 9.3%, 브라질은 5.9%에 이른다. 치안 회복, 범죄와의 전쟁이 이들 나라들에서는 절체절명의 과제다.

▲마약·게릴라…범죄 도시 칼리
이들 나라에서는 마약 재배·밀매 조직 등과 연계된 범죄의 뿌리가 워낙 깊다. 그러다 보니 어디에서부터 해결을 모색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자포자기 분위기가 만연한 것부터가 큰 문제다. 정치인·공무원들이 그때그때 대증적인 처방으로 민심을 진정시키려고 하지만 금세 효과가 떨어지기 일쑤다. 그러다 보니 공권력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돼 왔다. 그런데 최근 들어 여기에 독특한 과학적 지식과 기술을 접목해 변화를 시도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선봉에는 독특하게도 하버드대에서 전염병학(역학)을 전공한 한 시장이 있다.

콜롬비아의 칼리는 수도 보고타에서 남서쪽으로 약 300km 떨어진 인구 240만 명의 대도시다.
콜롬비아는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미국이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할 때 주 타깃으로 지목할 만큼 북미 마약 공급 루트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가진 국가다. 또한 반정부 게릴라들이 여전히 밀림에 은거하고 있다가 수많은 테러를 자행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대형 마약 카르텔에 의한 조직범죄는 물론이요 평범해 보이는 개인 범죄까지 기승을 부리고 있고 이 모두가 가히 ‘언터처블(Untouchable)’이라는 분위기가 만연했다. 칼리도 결코 예외가 아니었다.

그런데 1992년 시장에 취임한 로드리고 벨라스코 시장은 색다른 관점으로 이 문제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범죄가 ‘질병의 증상’이라는 인식이다. 이게 과연 무슨 이야기일까. 그에 따르면 콜롬비아 사람들이라고 해서 다른 선진국에 비해 특별히 더 흉악하거나 그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마약 카르텔 등 범죄단체, 각종 부패와 사회적 문제는 이런 건강한 국민 정서를 좀먹는 질병의 역할을 한다. 질병이 심각해지면 고열에 시달린다든지, 피부가 온통 부르트고 피고름이 나오듯 각종 증상에 시달린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수많은 흉악 범죄는 바로 이런 증상에 해당한다. 반면 반복돼 온 치안 강화 조치는 그저 매일 연고를 바르고 고름을 짜내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는 시각이다.

당연히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질병을 하나하나 고쳐 나가야 한다. 그런데 질병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처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과학적이고 정밀한 검사가 선행돼야 한다. 벨라스코 시장은 그 해답을 면밀한 데이터 분석에서 출발했다.

벨라스코 시장은 범죄자들의 인구통계 및 사회적 특징, 우범 지역, 범죄 유형 등을 상세히 조사해 나갔다. 그 결과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역시 범죄들은 대부분이 도시 빈민 지역의 저학력, 젊은 남성 실업자들에 의해 저질러지고 있었다. 그리고 약 80%는 총기가 사용됐고 약 3분의 2는 주말이 아닌 주중에 벌어지는 것이었다. 또 절반 가까운 범죄가 취한 상태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벨라스코 시장은 이러한 분석을 근거로 흉악 범죄의 근본 원인이 단순한 조직범죄보다 사회 시스템 붕괴에서 비롯된 것을 간파했다.

▲새벽 주류 판매 금지…‘면역력’ 복원도
마약 운송 등의 조직범죄의 역할은 일종의 에이즈(AIDS)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에이즈의 정확한 병명, 후천성면역결핍증이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듯이 사람은 HIV 바이러스의 감염 그 자체에 의해 죽는 것이 아니다. HIV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사람의 면역 체계가 심각하게 약화된다. 그러면 사소한 감기 같은 별것 아닌 질병에 걸려도 금세 몸이 버텨내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조직범죄는 여느 콜롬비아 국민들을 직접 죽음으로 내몰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수많은 경찰력·행정·사법력 등 국가의 대응 시스템을 약화, 소모시킨다. 그러면 다른 나라였으면 경범죄로 끝났을 수많은 갈등 요인들이 치명적인 살인 사건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예컨대 한국에서도 요즘 이웃 간 층간 소음 문제가 꽤 시끄럽지만 그래도 대부분은 그냥 삿대질과 욕설 정도로 끝난다. 하지만 평소에 실업 등으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술도 한잔 걸친 데다 마침 집 한구석에 권총이 있다면 어떨까. 분명 살인 사건으로 치달을 확률이 폭증할 것이다. 바로 콜롬비아의 문제가 이런 것이었다.

벨라스코 시장은 이를 막기 위해 전염병 등 각종 질병에 대응하는 방역 기법들을 응용했다. 면역 체계가 망가진 사람들에게는 면역 회복을 위한 처치와 함께 이런 위험 인자들의 확산을 막기 위한 엄격한 생활 수칙 강제가 필요하다. 그는 데이터 분석을 근거로 새벽 2시 이후 공공장소에서 주류 판매를 금지했고 사람들이 술을 많이 마시는 시기에는 총기 소지를 엄격하게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뭔가 우습게도 보이지만 범죄로 이어지는 복합적인 원인들을 차단하는 규제 마련에 앞장선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이 효과에 대해 반신반의했지만 그 효과는 대단했다. 1994년 10만 명당 124명에 이르던 살인 사건 사망률이 3년 만인 1997년 86명으로 감소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수도 보고타 등 다양한 도시들이 이런 정책들을 도입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역시 큰 성과를 거뒀다.

이런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현안 진단 및 정책 처방은 벨라스코 시장이 다름 아닌 전염병학 전문가였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하버드대에서 전염병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자신의 과학적 통찰을 공공 부문의 치안 개선에까지 확대해 성과를 냈던 것이다. 칼리 시장으로 성가를 드높인 그는 이어 범미주건강기구(PAHO)에서 본연의 업무로 돌아갔다.

그는 2011년 다시 칼리 시장으로 컴백했다. 이번에는 18년의 공백 기간 동안 한층 더 정교하게 발전된 각종 현대적인 데이터 분석 기법을 들고 말이다. 당시 선진국에서도 빅 데이터 분석 기법을 활용해 주요 우범 지역 및 발생 시간을 예측하고 그 지역 및 시간대에 제한된 경찰력을 집중 배치하는 방법으로 범죄율 감소에 큰 성과를 거두기 시작하던 시점이었다.

벨라스코 시장은 이러한 사례들을 근거로 다시 한 번 칼리의 범죄 패턴을 한층 면밀히 분석했다. 그 결과 자신의 1990년대 1기 재임 시절과 현격한 환경 변화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간 개인 범죄는 크게 감소한 반면 조직범죄에 의한 살인 범죄율이 크게 올라 있었다. 원인이 다르니 처방도 다르게 내려졌다.

벨라스코 시장은 범죄 집단의 중화기에 대응할 수 있도록 한층 강화된 경찰력 투입을 우선 실시했다. 하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 노력을 병행했다. 우범 지역에서 생활수준을 높이는 다양한 빈곤 퇴치 정책을 폈고 아이들이 범죄 조직을 기웃거릴 시간을 줄이도록 학교의 방과 후 프로그램을 확대하는 등의 정책 패키지들을 실행했다.

그 결과 역시 인상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칼리 시의 살인 사건 사망률은 2012년 10만 명당 83명에서 2014년 62명으로 다시 빠른 개선 추세로 돌아서고 있다. 여전히 정력적으로 행동하고 있는 벨라스코 시장은 자신의 두 번의 재임 기간 속에서 거둔 성공을 토대로 전 세계를 향해 보다 적극적인 데이터 기반 행정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끝)

오늘의 신문 - 2024.05.02(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