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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막말이 논란이 되지 않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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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부 이정선 기자) 미국 공화당의 대선주자 가운데 한 명인 도널드 트럼프는 '막말'로 많은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멕시코 불법이주자 상당수가 마약 딜러이고 강간범이다"라는 주장이 대표적입니다. 얼마전엔 공화당 후보 유일한 여성인 전(前) HP 회장 칼리 피오리나를 향해 "저 얼굴 좀 봐라. 어떻게 저런 사람이 대통령이 될 수 있겠나"라고 비아냥대면서 막말의 대가다운 모습을 또 한번 보여줬습니다.

그가 23일(현지시간)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유세현장에서 또 한번 거친 발언을 쏟아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 이번 그의 막말은 미국에서 아무런 이슈를 몰고 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트럼프가 이날 막말을 퍼부은 대상이 이전과는 성격이 다른 사람이기 때문일 겁니다.

트럼프의 공격을 받은 사람은 최근 약값 폭리 논쟁을 불러일으킨 튜링제약사 대표 '마틴 슈크레리'입니다. 마틴 슈크레리는 한알에 13.5달러(1만6000원)에 팔던 말라리아 등의 치료제 '다라프림'의 약값을 하룻밤 새 750달러(약 90만원)으로 올려 여론의 집중포화를 맞고 있는 인물입니다. 헤지펀드 매니저 출신인 그는 출시된 지 62년된 다라프림의 소유권을 인수하자마자 급격히 약값을 올려 환자들과 의료진들이 반발하고 있는 상황이죠. 미국에서 가장 탐욕스러운 인물의 대명사로 떠오른 셈입니다.

트럼프는 약값 폭리 논란의 중심에 선 마틴 슈크레리를 향해 한마디로 "역겹다(disgusting)"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는 또 "헤지펀드 가이(guy)가 약값을 올렸다"며 "내게는 ‘버릇없는 녀석’으로 보인다"고 거침없는 막말을 쏟아냈습니다. "의자에 편히 앉아 자신이 대단한 것처럼 우쭐대고 있지만, 그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의 행동은 수치스러운 일이다"라고도 했습니다.

앞서 민주당의 대권주자중 하나인 힐러리 클린턴도 “특정 질병을 위한 치료제로 폭리를 취하는 것은 잔인무도한 일”이라며 “약값 인상에 대응하는 방안을 내놓겠다”라고 비판했었습니다.

하지만 민주당보다 기업을 옹호하는 공화당 후보인 트럼프가 슈크레리 비판에 나선 것은 다소 의외라는 시각도 있습니다. 예컨대 월스트리트저널은 “클린턴은 의약시장의 혁신을 가로막았다”는 제목의 24일자 사설을 통해 "클린턴이 최근 제약회사에게 약값을 인상하지 못하도록 했는데 더 좋은 의약품을 만들 기회를 가로 막은 것이다. 가격은 민간에서 정해야 하는 것이지 정치인이 임의로 정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습니다.

트럼프가 반기업(?)적인 견해를 밝힌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그는 최근 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이 과도한 보수를 받고 있다고 지적해 공화당 지지자들을 당혹스럽게 했죠. 특히 지난달 출연했던 CBS방송에서는 "헤지펀드나 사모투자펀드(PEF) 매니저들이 소득세보다 세율이 낮은 자본 이득세를 내는 허점을 막겠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트럼프에게 헤지펀드 매니저 출신인 슈크레리는 더 밉게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트럼프의 원색적인 막말이 미 정치판에서 논란을 불러일으키지 않은 건 슈크레리의 사례가 처음인 것 같습니다.(끝) /sun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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