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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발칵 뒤집은 낙태관련 비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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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박수진 특파원) 24일(현지시간) 프란치스코 교황이 다녀간 후 워싱턴 의회 의사당을 찾았습니다.상원은 어느 때보다 분주했습니다. 박수와 환호가 지나간 자리엔 현실적인 법안들을 둘러싼 의원들간 불꽃튀는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공화당 원내 대표인 미치 맥코넬 의원을 비롯해 대선 주자인 테드 크루즈(텍사스), 마르코 루비오(플로리다). 민주당의 해리 리드 원내대표와 엘리자베스 워런(매사추세츠) 의원, 무소속의 버니 샌더스(버몬트) 등 낯익은 의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심각한 토론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투표종료 시간이 다가오자 하나씩 서기에게 다가가 법안에 대한 찬반 여부를 ‘예’(아이·YEAS)또는 ‘아니오’(나이·NAYS)로 의사표현하더군요. 직접 말로 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엄지 손을 위로 치켜들거나 내려서 의사 표현을 하기도 했습니다.

서기는 이를 받아서 장내 마이크를 통해 이름과 찬반 여부를 불러 줍니다. 그러면 기자들과 의회 관계자들이 100명의 의원 명단이 적힌 종이에 찬반을 체크해 법안 통과 여부를 확인하게 됩니다. 어떤 의원은 의사표현을 했다가 나중에 와서 바꾸기도 하더군요. 진지한 토론 과정에서 마음이 바뀌기도 한다고 합니다. 전자투표를 통해 한꺼번에 의원별 찬반 여부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한국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습니다.

이날 투표에는 대선 경선 유세에 바쁜 대선주자들도 다 참석했습니다.그 만큼 이날 투표 자체가 중요하다는 애기입니다. 이날 처리한 법안이 비영리여성지원단체인 ‘플랜드 페이런트후드’(planned parenthood)에 대한 재정지원 중단법안이었습니다. 이 법안이 통과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내년 예산안이 기한내(이달 30일) 처리될 수 있느냐 없느냐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예산안이 기한내 처리되지 않으면 2013년처럼 연방정부가 문을 닫게 됩니다.

공화당은 이 법안이 처리돼야 내년 예산안을 합의해 주겠다고 하고, 민주당은 법안 처리는 안된다고 버텼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공화당이 졌습니다. 공화당내에서 8표의 이탈표가 발생해 민주당의 뜻대로 법안 처리가 무산됐습니다.

그렇다면 여성단체를 지원하는 법안 처리가 왜 그렇게 중요할까요. 플랜드 페어런트후드는 여성들의 예상치못한 임신과 낙태, 출산, 그 후 건강관리 등을 지원하는 비영리 단체입니다. 미 전역에 700여개 헬스지원센터를 두고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미 정부는 여기에 연간 5억달러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연간 240만명의 여성이 이 단체를 통해 지원받는다고 합니다.

민주당은 낙태 찬성입장에서 지원을 계속해야 한다는 입장이고, 공화당은 낙태 불허 입장에서 사전 성교육 위주로 예산지원 내용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지난 7월 낙태 반대단체인 ‘의료 진보 센터’(Center for Medical Progress)가 플랜드 페어런트후드 관계자와의 대화 내용을 몰래카메라에 담아 공개하면서 불거졌습니다. 몰카엔 단체 관계자들이 적출된 태아의 신체 일부를 매매하는 문제를 언급하고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이 비디오가 공개되면서 미 전역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태아의 신체장기별로 가격을 거론하는 장면이 여과없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단체는 공공의 적이 됐고, 공화당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오바마 정부를 공격했습니다. 단체에 대한 예산 지원 중단은 물론 사건 전면 조사와 함께 관계자 처벌 등을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특히 2탄으로 낙태를 당한 후 아직도 살아있는 태아의 장기를 적출하는 의사의 고백이 공개되면서 사태는 더욱 심각해졌습니다. 공화당은 이 단체에 대한 예산중단을 하지 않으면 내년 예산안을 통과시켜주지 않겠다고 공언하고 나섰습니다.

이 문제는 미 공화당 대선주자 TV토론회에서도 이슈가 됐습니다. 전 휴렛팩커드 최고경영자(CEO)였던 칼리 피오리나가 똑 부러지는 목소리로 “오바마 대통령도 비디오를 끝까지 봐야 한다”고 주장해 지지율이 치솟았죠.

그러나 24일 이 단체에 대한 예산중단 법안은 부결됐습니다. 이유야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현실적인 이유가 큰 것 같습니다. 당장 단체를 운영하지 않으면 더 큰 문제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워싱턴포스트는 이날 저녁 의회예산국(CBO) 보고서를 입수해 보도했습니다.원하지 않는 출산에 대해 대응하지 않으면 출산과 양육으로 이어지고, 이 경우 대부분 저소득층인 이들에게 메디케이드 등을 통해 무상의료 서비스가 지원돼야 하기 때문에 정부 예산지출이 급격하게 늘어난다는 설명입니다.

법안 부결로 상황은 더욱 복잡하게 됐습니다. 민주당은 내년 예산안을 당장 처리해야 하는데 공화당과 대립각을 더 세우게 됐고, 공화당은 법안처리 불발로 예산안 처리에 동조할 명분을 하나 잃어버리게 됐습니다. 민주·공화당 지도부가 서로 명분도, 실리도 챙기는 어떤 묘책을 만들지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끝) /psj@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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