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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현 회장 대법원 판결의 오묘한 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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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병훈 지식사회부 기자) 대법원이 최근 이재현 CJ그룹 회장 사건을 파기환송했죠. 횡령에 대한 판단은 그대로 확정됐고 배임액 산정만 다시 하라며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 1심과 2심 판결을 보면 배임액을 산정하면서 고민한 흔적이 전혀 안보입니다. 파기환송될 정도라면 하급심 입장에서는 적어도 ‘이렇게 하는 게 맞는지’ 고민이라도 했을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게다가 하급심이 배임액을 그렇게 산정하는 근거로 삼은 건 과거의 대법원 판례입니다.

그렇다면 대법원이 이번에 자신의 기존 판례를 뒤집은 걸까요. 그러고보니 대법원의 이 회장 판례가 전원합의체에 회부됐다가 다시 소부(대법관 4명으로 구성된 재판부)로 돌아오기는 했습니다. 기존 판례를 뒤집을 때는 반드시 전원합의체에서 해야하는데 소부로 돌려보냈다는 건 판례 변경까지는 아니라는 걸까요.

이 회장에게 적용된 배임 혐의는 일본 부동산 매입과 관련돼 있습니다. 이 회장은 자신이 소유한 회사인 팬재팬 명의로 일본 부동산을 구입하기 위해 신한은행 도쿄지점에서 2006~2007년 두 차례에 걸쳐 모두 39억5000만엔(309억원)을 대출을 받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CJ재팬이 보증을 서도록 한 게 문제가 됐습니다. 검찰은 “사적인 이익을 챙기기 위해 경영자로서의 권한을 남용해 법인의 재산을 담보로 맡겼다”며 이 회장을 기소했죠.

이 혐의의 배임액 산정과 관련된 원심 판결문을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배임의 피해자인 법인에) 실제로 손해를 가한 경우뿐만 아니라 손해의 위험을 초래한 경우도 배임에 포함된다”, ②“채무변제능력을 상실한 회사를 위해 지급보증하는 게 배임이 될 때는 지급보증금액 전체가 배임액이 된다”, ③“대출원금 및 이에 대한 액수 미상의 이자 상당액을 (CJ재팬에 대한) 배임액으로 봄이 타당하다”…. 이중 ①과 ②는 기존의 대법원 판례입니다. 이 두가지 명제를 기초로 해서 ③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낸 것이죠.

얼핏 보면 맞는 것 같지만 원심이 놓친 부분이 있었습니다. 바로 ‘체무변제능력을 상실한 회사를 위해’라는 조건입니다. 망해가는 회사가 돈을 빌릴 때 지급보증을 섰어야 해당 금액 전체를 배임액으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원심이 인용한 과거의 대법원 판례는 지급보증을 서는 시기에 이미 회사가 망하기 직전이었고 따라서 대법원이 지급보증액 전체를 배임액으로 인정했습니다. 예를 들어 2007년의 판례를 보면 법인의 경영자가 거의 망하기 직전인 계열사 5곳의 명의로 대출을 받으며 우량한 계열사가 보증을 서게 했네요.

대법원이 이 회장 사건을 파기환송한 건 팬재팬은 그정도 지경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나름 우량한 회사였고 따라서 자력으로 돈을 갚을 수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해당 금액 전체를 배임액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죠. 공소사실이 아예 무죄라는 건 아니고 다만 배임액 산정을 다시 해야 한다는 취지입니다. 그런데 대법원 관계자에 따르면 이 사건에 검찰이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CJ재팬이 담보를 제공하며 얼만큼의 손실을 볼 수 있었는지”를 정확하게 산정하는 게 거의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검찰은 파기환송심에서 형법상 배임죄를 주장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사건 원심에서 적용한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은 배임액이 정확해야 적용할 수 있지만 형법상 배임죄는 금액이 구체적이지 않아도 가능하거든요. 다만 법정형이 형법상 배임죄가 더 낮기 때문에 이 회장의 총 형량은 내려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파기환송심 결과를 지켜봐야겠네요. (끝) /h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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