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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마르크를 살린 '저질' 독일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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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의 역사읽기) 1866년 5월 7일 독일 베를린. 프로이센 수상이었던 비스마르크는 평상시처럼 궁에서 국왕에게 보고를 마친 뒤 운터 덴 린덴 거리를 따라 관저가 있는 빌헬름가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가 러시아 대사관 무렵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두발의 총성이 울렸다.

급히 몸을 돌린 비스마르크는 자신에게 세 번째로 총을 발사하기 위해 총부리를 겨눈 젊은이를 발견했다. 비스마르크는 그 청년에게 달려들었다. 튀빙겐대 학생이었던 코헨블린트는 격투 끝에 비스마르크에게 직접 잡혀서 지나가던 경찰에게 넘겨졌다.

비스마르크가 집에 도착해서 보니 총알이 가슴부위 금속 단추에 튕겨져 나갔던 것이 아닌가. 총알이 가슴을 때렸지만 천운으로 목숨을 건진 것이었다.

비스마르크 암살기도 소식은 삽시간에 도시 전역에 퍼졌고 시민들은 몹시 흥분했다. 빌헬름1세도 즉각 말을 타고 달려와서 엄청난 행운에 안도하며 위로를 표시했다. 곧 비스마르크를 보기 위해 시민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빌헬름가의 교통이 마비되다시피 했다. 비스마르크는 자택 창가에서 시민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고, 국왕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코헨블린트의 암살 기도 이후 프로이센 전역에서 여러 여론이 형성됐다. ‘독불장군’이었던 데다가(저명한 역사학자 A. J. P.테일러는 비스마르크가 각료 중에 자신에게 반대 의견을 내는 인물에 대해선 의견을 수용하기 보다는 경질하는 쪽을 택했다고 전한다.) 독일 내 자유주의 운동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비스마르크에게는 적이 많았다.

비스마르크 반대파들의 목소리는 ‘극단적’이었다. 베를린대학의 시간강사였던 드브와 레몽은 비스마르크와 저격범이 마주섰던 운터덴 린덴가 스틸케스서점에 나타나 미수에 그친 저격사건에 대해 불만을 터뜨렸다.

“독일 총은 어찌 그리 저질이란 말이냐!”라고.

몇몇 진보성향 신문들도 “국민의 다수가 암살이 성공하지 못한데 참으로 유감을 표한다”는 기사를 게재하기도 했다. 베오바크터란 신문은 논평을 통해 “한 젊은이가 악마로부터 조국을 구하기 위해 어느 누구도 감히 하지 못한 일을 목숨을 걸고 감행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반대파의 움직임도 만만치 않았다. 저격 사건 이후 보수적인 베를린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횃불 행렬까지 만들어 비스마르크를 위로했다.

원래 각종 공산품의 제조 국을 표시하는 ‘made in ~’라는 표현은 19세기 영국에서 후발산업국가 독일의 저질저가 제품이 쏟아 들어오자 영국제품과 구분짓기 위해 의무화됐다. 이후 역설적으로 ‘made in germany’란 표기는 신뢰성 있는 제품의 대명사가 됐지만 말이다. 최근 미국시장에서 독일기업 폭스바겐이 배출가스 조작 스캔들로 신뢰에 금이 갔다. 비스마르크 암살 시도가 있을 때까진 저질 제품으로 불렸던 독일 제품이 이후 ‘명품’ 취급을 받았고, 다시 믿을 수 있는 제품인지 의심받게 됐다. 역사는 또 이렇게 돌고 도는 모양이다. (끝)

***참고한 책***

강미현, 『또 다른 비스마르크를 만나다-철혈재상 또는 영원한 애처가』, 에코리브르 2012

A. J. P. Taylor, 『Bismarck-The man and the statesman』, Vintage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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