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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만 되면 뭍으로 올라왔던 그리스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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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의 역사읽기) 고대 그리스인, 정확하게는 아테네인은 노를 밀 때 나는 소리와 끌어당길 때 나는 소리를 구분하는 단어가 따로 있을 정도로 바다에 정통했다. 노를 밀 때 소리는 ‘피티로스(pitylos)’, 노를 끌어당길 때 물살이 솟구치며 나는 소리는 ‘로티오스(rhothios)’로 구분해 불렀다고 한다.

아테네인은 배에 관한한 ‘달인’이었다. 하루 종일 노를 저으면서도 10노트 속도를 꾸준히 냈다는 ‘삼단노선(trieres)’은 아테네 해군력의 상징이었다. 아테네인들은 이 삼단노선을 긴 배를 뜻하는 ‘나우스(naus)’라는 단어로 분류했다. 오늘날 영어에서 바다와 관련된 수많은 단어들이 희랍어 ‘나우스’에 뿌리를 두고 있다. 예를 들면 ‘해군(navy)‘이나 ‘항해자(navigator)’, ‘항해의(nautical)’, ‘뱃멀미(nauseae)’, ‘앵무조개(nautilus)’ 를 뜻하는 영어 단어가 대표적이다.

이들 삼단노선간 전투에선 키잡이 기술이 승패를 좌우하는 주요 변수가 됐다고 한다. 아테네인들은 이들 키잡이를 ‘쿠베르네테스(kubernetes·κυβερνήτης)’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단어는 로마시대가 되면 라틴어 ‘구베르나토르(gubernator)’로 변형되고, 이는 현대 영어의 ‘지사(governor)’ ‘정부(government)’ 같은 말의 어원이 됐다.

살라미스 해전을 비롯해 고대 그리스 세계의 위대한 해전들은 모두 해안과 가까운 바다에서 이뤄졌다. 오늘날 시각에서 보면 약간 우습기도 하지만 해전은 대부분의 경우, 돛배가 힘을 쓰지 못하는 ‘잔잔한’ 바다에서 벌어졌다.

전투는 주로 바람이 없는 아침 시각에 치러졌고, 바람이 불면 전투가 중단됐다. 돛대와 돛은 전투에 거추장스럽기만 했으므로 전투에 나갈 때는 돛을 육지에 내려놓고 가는 것이 상례였다. 잠은 땅위에서 자야 했으므로 전투 장소는 언제나 육지를 지척에 두고 전개됐다.

육지와 가까운 바다에서 싸운 것으로도 모자라서 삼단노선은 바다 위에 있는 시간 못지않게 땅 위에 올라와 있어야 했다. 좀조개가 달라붙어 나무를 갉아먹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하루 단위로 선박을 말려줘야 했던 것이다.

낮에는 바다 위를 배가 누비다가 밤이 되면 육지로 올라오는 ‘수륙양용 괴물’이 됐다는 것이다. 아테네 선원들은 항상 밤이 되면 배를 들고 나르느라 파김치가 된 채 모항인 피레우스 항구로 돌아와 돌 선가대에 삼단노선을 끌어올려 주랑식 선박 보호소에 집어넣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이렇게 상륙한 배들은 민회에서 출항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마치 마구간의 경주마들처럼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는 게 고대 그리스 해군 전문가 존 헤일 박사의 표현이다. 안전을 위해 ‘배가 산으로 가는’사태가 해양제국 아테네에선 매일 반복됐던 셈이다.

‘세월호 사건’이 터진지 얼마나 됐다고 또 다시 선박 침몰 대형사고가 발생했다. 아마도 고질병 같은 안전불감증이 또다시 불거진 것은 아닌가 싶다. 정확한 사고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해경의 안전관리와 초기대응에는 또다시 적잖은 문제가 있는 모양이다. 안전을 위해 밤마다 뭍으로 다시 올라왔던 고대 그리스인 만큼의 안전의식도 갖추지 못한 것 아닌가 하는 자괴감도 든다. (끝)

***참고한 책***

존 R.헤일, 『완전한 승리, 바다의 지배자-최초의 해상제국과 민주주의의 탄생』, 이순호 옮김, 다른세상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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