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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발해·일본 사신단의 '자리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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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의 역사읽기) “(일본 사신단이)초리에서 출발해 장안의 장락역(長樂驛)에 도착한 후에야 오품 관리들이 그들을 맞이해 황제의 칙명을 전하는 등 당나라 조정에선 일본 사신단에게 합당한 답례를 하지 않았다. 반면 신라에선 태렴(泰廉)왕자가 사신으로 장안에 도착하니 관리들은 황명을 받들어 사신단을 맞이했고, 사신단이 마차에서 내려 답례를 했다. 그러나 발해의 사신은 모두 말에서 내린 후에 예의로 답했다.” (『속일본기(續日本紀)』 권35 광인천황기(光仁天皇紀) 보구(寶龜)10년(779년) 하사월 신묘조)

위의 글은 당나라 장안에 도착한 신라와 발해, 일본 삼국의 사신에 대한 당나라측 대접에 차이가 있는 것을 본 일본 측이 남긴 약간의 ‘질투 섞인(?)’기록이다. 당나라에 사신이 도착했을 때 일본 사신에겐 답례를 하지 않았고, 신라 사신에겐 곧장 답례를 했으며, 발해사신에겐 먼저 예의를 표하는 것을 본 후에 답례를 했다는 내용의 글이 남아 있는 것이다.

현대 역사학자들은 이 같은 기록을 바탕으로 당나라가 상대방에 대해 외교적인 형식과 예의를 달리했다고 분석한다. 특히 “백제는 오만하고 게을러서 망했고, 고구려는 교만에 가득차 위태로우나 신라는 충성과 믿음으로 보존되었다”(『삼국사기』 「김유신 열전」)는 김유신의 표현처럼 일찍부터 당나라에 순응적 외교를 펴온 신라가 나름의 ‘과실’을 챙겼음도 넌지시 추측해 볼 수 있다.

8세기 무렵에 당나라 입장에서 신라는 중요한 외교 대상국이었기에 일본과는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위상에 차이가 있었고, 발해의 경우는 당이 동북방에서 기미정책을 실시한 후에 여러 부족이 모여 성립된 국가였기에 당의 입장에선 발해의 국제적 지위가 신라보다 한 단계 낮았다는 게 왕샤오푸 베이징대 역사학과 교수의 시선이다.

이 같은 현상은 9세기 들어 신라의 국세가 약해지고 상대적으로 발해가 강해지면서 변화의 조짐을 보인다. 당나라에서 과거의 우월적 지위를 유지하려는 신라와 현실적 우위를 확인 받으려는 발해간 상호경쟁이 벌어진 것이다.

이에 따라 897년 발해 사신이 신라 사신보다 윗자리에 앉기를 요구해 논란이 빚어졌고,872년에는 발해 유학생 오소도(烏昭度)와 신라 유학생 이동(李同) 사이에 당나라 빈공과 시험에서의 수석 다툼도 벌어졌다. 2년 뒤 빈공과에 장원급제하는 최치원이 “나라의 수치”라며 발해의 약진에 분개했던 것도 이때다. 906년에도 신라 최언위와 발해 오광찬(烏光贊)사이에 또다시 수석경쟁이 벌어졌다.

당나라 자체는 황소의 난 등을 통해 쇠약해지고 있었지만 신라와 발해 간에는 당나라 마음 들기 경쟁을 벌였던 것도 사실이라는 점이 몇 편 안되는 기록에서 여러 차례 드러나는 것이다.

내달 3일 중국 ‘전승절’ 열병식 행사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착석할 자리에 관한 관측이 무성하다. 박 대통령이 시진핑 중국 주석 바로 왼쪽에 서고,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오른쪽에 설 가능성이 크다거나 북한 최룡해 노동당 비서는 뒷줄 구석에 갈 것이라는 둥 설이 분분하다. 국익을 고려해 어려운 걸음을 하는 국가지도자가 좋은 대접을 받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왠지 1000여년전 빚어진 ‘자리 싸움’의 현대판 버전으로 번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도 없지는 않다. (끝)

***참고한 책***

왕샤오푸,‘8세기 동아시아 역사의 구조’,이기동·연만수 外, 『8세기 동아시아의 역사상』, 동북아역사재단 2011 中

구대열, 『삼국통일의 정치학』, 까치 2010

송기호, 『발해를 다시본다』, 주류성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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