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기즈칸은 위대한 정복자이자 뛰어난 리더로서 새로운 CEO상으로까지 재조명 받는 인물이다. 하지만 생존을 위해서, 그리고 제국의 안정과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선 눈 깜짝하지 않고 가족을 내친 ‘냉혈한’ 이기도 했다. ‘칭기스’란 단어는 호수, 바다로부터 유래했다고 하는데 아마도 칭기즈칸의 비전과 욕망이 바다처럼 컸던 것이지 그의 인간적인 ‘따뜻함’이 바다처럼 넓었던 것은 아닌 듯하다.
잘 알려진 데로 칭기즈칸이 테뮈진이라 불리던 어린 시절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아버지 이쉬게이가 갑작스레 죽은 후 주변사람들이 모두 테뮈진 가족을 떠나버린 탓이다.『 몽골비사』의 표현대로 “깊은 물이 마르고 단단한 돌이 부서진” 형국이었다.
극도의 곤경에 빠진 테뮈진 가족은 오논강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 “배와 다른 과실들을 따다가 목구멍을 채웠고, 아이들이 활과 낚시로 하루하루 양식을 구해 끼니를 때워야 하는” 삶을 이어갔다.
이런 상황에서 테뮈진과 이복형제들은 경쟁과 대립, 질투는 극도로 심각했다. 테뮈진의 아버지 이쉬게이는 부인 희엘륀과 사이에서 테뮈진과 조치 하사르의 두 아들을 뒀다. 다른 부인으로부터 벡테르와 벨귀테이라는 아들도 있었다.
문제는 벡테르와 벨귀테이가 사냥한 노획물을 테뮈진, 하사르와 나누기를 거부하면서부터 발생했다. 노획물의 배분은 유목민 생활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몽골비사』는 테뮈진이 벡테르로부터 “낚시로 잡은 물고기를 벡테르한테 뺏겼고 이전에도 활로 쏴 잡은 종달새를 뺏긴 적이 있다. 어떻게 함께 살겠는가”라고 분노를 터뜨리며 조그만 구릉 위에서 말떼를 바라보던 벡테르의 뒤로 몰래 다가가 “앞에서 뒤에서 그를 쏘아 죽어버렸다”고 전한다.
이쉬게이의 정식 부인 소생이자 장자로서 테뮈진은 집안의 우두머리였다. 이복형제가 자신의 특권을 침해하자 죄를 범한 가족의 성원을 처벌할 권리를 행사한 것이다. 벡테르도 죽기직전 테뮈진에게 변명하거나 도망가려 하지 않고 다리를 꼬고 앉은 채 “핏줄이 끊어지지 않게 동생 벨귀테이만은 살려 달라”고 부탁했다는 점에서 미뤄볼 때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는 게 현대학자들의 추론이다.
어머니 희엘륀이 “제 모태를 물어뜯는 개와 같고, 제 그림자에 덤벼드는 해동청과 같다. 형제들의 한을 풀지 못하고 원수를 갚지 못하는 상황에서 어쩌자고 네놈이 이런 짓을 했느냐”고 한탄했지만 이미 지나간 일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이처럼 테뮈진이 그의 이복형을 죽였을 때 나이는 오늘날로 치면 초등학교 고학년에서 중학생이라고 할 수 있는 14~15세로 추정된다.
이후에도 테뮈진은 타이치우트족의 포로가 되서 시련과 고난을 겪었고 풀려난 뒤에도 그와 그의 가족들은 초원에서 들쥐를 잡아먹고 살았을 정도로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테뮈진의 시련은 결혼에도 이어졌다. 테뮈진이 신부를 맞이한다는 소문을 듣자 테뮈진의 아버지가 예전에 자신들의 신부(테뮈진의 어머니 희엘륀)를 약탈해간데 대한 복수로 메르키트족이 테뮈진을 습격했다. 300명의 메르키트족이 갑자기 테뮈진의 둔영을 습격하자 테뮈진과 그의 가족들은 사방으로 도망치기에 바빴다. 각 가족들은 모두 말에 올라타 잽싸게 내뺐지만 테뮈진의 새신부 뵈르테가 탈 말은 없었다.
이 같은 상황에 대해 칭기즈칸 전기의 결정판이라고 할 만한 책을 쓴 독일 역사학자 라츠네프스키는 “테뮈진이 극도로 위급한 상황에서 판단력을 잃은 것인가. 아니면 메르키트의 추적을 딴 곳으로 돌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뵈르테를 떨어뜨려 놓은 것인가”라며 테뮈진의 의도에 강한 의구심을 드러낸다. 라츠네프스키에 따르면 실제로 메르키트족은 수레에 숨은 뵈르테를 발견하자 테뮈진에 대한 추격을 중지했다. 어쨌든 테뮈진이 살아남은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구사일생한 테뮈진의 일성도 부인을 뺏긴 괴로움과 아쉬움이 아니라 “나는 벼룩과 같은 목숨을 건졌다. 정말로 무서웠다. 앞으로 부르한 할둔산에 아침마다 기도를 드리리다”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 후 한동안 테뮈진은 무분별하게 뵈르테를 찾아오기 위해 모험적인 계획을 세우지도 않았다
결국 뵈르테는 메르키트족에 납치되고, 얼마 후 테뮈진이 메르키트족을 물리치고 뵈르테를 구출하지만 뵈르테는 아기를 임신하고 있었다.
예기치 않게 노상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조치’라는 이름이 붙은 이 테뮈진의 장남에 대해 라시드 앗 딘을 비롯한 궁중사가들은 “메르키트가 습격했을 때 이미 뵈르테는 테뮈진의 아이를 가지고 있었다”며 칭기즈칸과 뵈르테의 명예를 보호하려 사실을 위장했지만 큰 신빙성은 없다. 오히려 『몽골비사』는 냉정하게 “뵈르테는 희엘륀에 대한 앙갚음으로 메르키트족에게 강탈당했고 연혼제의 풍습에 따라 메르키트족 족장의 동생에게 부인으로 주어졌다”고 전한다.
결국 조치는 죽을 때까지 ‘메르키트의 사생아’로 불리며 정통성에 의심을 받았다. 태생의 굴레는 그의 죽음까지 연결됐다.
몽골제국의 초석이 닦인 1223년 초 칭기즈칸은 차가타이, 외괴데이 등 자신의 다른 아들들과는 회합을 했지만 장남인 조치만은 서방지역 호라산에 남아있게 했다. 아랍 역사가 주즈자니에 따르면 조치는 “칭기즈칸이 미쳐서 그토록 많은 사람을 학살하고 많은 지역을 파괴했다”며 “아버지가 사냥하는 틈을 타서 살해하고 술탄과 연합해 이 지방을 번영토록 만들겠다”는 말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발언을 들은 차가타이가 아버지에게 보고해 칭기즈칸이 조치를 독살시켰다는 게 주즈자니의 설명이다.
주즈자니의 기술은 전후관계와 기타 사실관계를 고려하면 신빙성이 약하지만 라시드 앗 딘에 따르면 조치와 칭기즈칸의 불화는 역사적 사실이었던 듯하다. 라시드 앗 딘은 “칭기즈칸이 고향으로 돌아온 뒤 조치를 불렀지만 조치가 이에 불응하자 다시 차가타이, 외괴데이를 보냈는데 이들이 당도하기도 전에 조치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고 기술하고 있다.
당시 나이가 40살 정도에 불과했던 조치는 자연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조치의 죽음의 배후에 칭기즈칸이 빠질 수 없다. 칭기즈칸은 자신의 사후에 조치와 차가타이간에 무력충돌이 일어날 가능성을 우려했고 제국의 통일을 유지하기 위해 (출생이 의심스러운) 조치를 제거했다는 해석이다.
실제 『몽골비사』에선 둘째 아들 차가타이가 칭기즈칸의 면전에서 장남 조치를 두고 “우리가 어떻게 이 메르키트의 잡놈한테 통치되겠습니까”라며 조치와 멱살잡이 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상황에서 싸움을 말리는 신료 쿠쿠초스의 표현은 시적이다. 아마도 실제 역사는 이 시적표현처럼 조치의 불운한 태생에 대해 사정을 감안해주지도, 넓은 아량을 베풀지도 않은 듯 하지만 말이다. 되돌아보면 볼수록 역사는 냉혹한 것이다.
“그대들 (조치와 차가타이)이 태어나기 전부터 별이 있는 하늘은 돌고 있었다. 여러 나라가 싸우고 있었다. 서로 빼앗고 있었다. 흙이 있는 대지는 뒤집히고 있었다. 모든 나라가 싸우고 제 담요에서 자지 않고 서로 공격하고 있었다. 그럴 때 (뵈르테가 다른 남자를) 원해서 간 것이 아니다. 교전 중에 그리됐다.(다른 남자에게로)도망쳐 간 것이 아니다.전투중에 그리 됐다. (다른 남자를) 사랑해 간 것이 아니다. 서로 죽일 때 그리됐다....”(『몽골비사』 제 11권 中)
***참고한 책***
라츠네프스키, 『칭기스한』, 김호동 옮김, 지식산업사 1994
『몽골비사』, 유원수 옮김, 혜안 1994
르네 그루쎄,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김호동 外 옮김, 사계절 1998
라시드 앗 딘, 『집사2-칭기스칸기』, 김호동 옮김, 사계절 2003
Bertold Spuler, 『History of the Mongols』, Routledge & Kegan Paul 1972
Morris Rossabi, 『Khubilai Khan-His Life and Time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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