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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이론으로 본 그리스의 협상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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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이심기 특파원) 게임이론의 승리.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가 이끄는 그리스의 급진좌파 시리자 정권이 최근 실시한 국민투표를 통해 채권단이 제안한 구제금융 협상안을 부결시키고 향후 재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면서 나온 해석이다.

외신들은 그리스 정부와 채권단의 협상 과정이 게임이론의 교본이 될 만한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게임이론의 전제는 단순하다. “양측의 입장은 똑같다. 이익은 극대화하고 손실은 최소화하는 것이다. 문제는 상대의 전략이다. 서로의 전략에 대한 불확실한 정보하에서 각자 선택의 우선 순위를 정해야 한다.”

시리자 정권은 긴축을 끝내겠다는 공약을 걸고 지난해 말 치러진 총선에서 정권을 잡았다. 하지만 선거 과정에서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에 남겠다는 점도 확실히 했다. 그리스 국민 대다수도 여기에 동의했다. 문제는 채권단과의 협상 때 유로존 잔류 공약이 게임이론의 관점에서는 협상에서 불리한 조건이 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주택구입을 위해 흥정을 할 때 자신이 집을 ‘반드시’ 사야 한다는 약점을 노출시키면 가격협상에 불리하게 작용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한 외신은 “그리스가 유로존에 남는 것이 긴축을 끝내는 것보다 더 절박하게 보인다면 채권단이 협상의 우위를 갖게 된다”며 “이는 거지에게는 선택권이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다”고 분석했다.

치프라스 총리가 채권단을 상대로 구사한 첫 번째 전술은 자신이 처한 협상의 위치를 바꾸는 것이었다. 즉 채권단에 ‘상대방(그리스 정부)은 긴축을 끝내는 것이 유로존에 남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는 확신을 심어주는 것이다. 이를 위해 치프라스 총리는 취임 후 러시아와 중국을 잇따라 방문, 정상회담을 통해 유로존을 떠날 수 있다는 신호를 보내는 고도의 외교전략을 사용했다. 그렉시트(그리스의 유로존 탈퇴)가 유로존을 이끌고 있는 독일과 프랑스에 심각한 정치적 타격을 줄 수 있다는 경고와 함께 그리스가 유로존과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체제에 묶여 있기를 원하는 미국에게도 부담을 준 것이다.

이를 통해 협상의 위치를 채권단과 동등하게 만든 치프라스 총리의 다음 전술은 스스로 퇴로를 차단하는 것이었다. 마치 전쟁에서 상륙작전을 감행한 부대가 자신들이 타고온 배를 불사르는 것처럼 국민투표 결과 채권단 협상안에 대한 찬성이 높게 나오면 물러나겠다고 배수의 진을 친 것이다. 그리스 국민들을 상대로 정부를 지지하거나, 아니면 뒤엎거나 양자택일을 하라는 고도의 심리전을 사용한 것이다. 자신이 갖고 있는 두 가지 선택, 유로존 잔류와 긴축안 철폐 중 하나를 제외시켜버린 것이다.

반면 채권단의 선택은 그리스에 추가 구제금융을 제공하고 유로존에 잔류시키느냐, 아니면 그렉시트를 감수하더라도 그리스에 긴축안을 관철시킬 것이냐는 두 가지 중 하나였다. 이 중 후자는 그리스가 유로존 잔류 공약을 유지할 때 사용할 수 있는 선택이지만 치프라스 총리가 긴축안에 대한 국민투표와 정권 진퇴를 연계시키면서 실효성을 상실했다.

이 같은 협상 위치의 변화는 과거 협상패턴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1차와 2차 구제금융 협상에서 주도권은 항상 채권단이 쥐고 있었고 결정적인 순간에 긴축안 수용이라는 ‘양보’는 항상 그리스의 몫이었다. 채권단은 유로존 잔류를 원하는 그리스의 약점을 십분 활용한 협상전략을 구사했고 매번 성공했다. 치프라스 정부도 초기 협상의 지위는 불리했지만 협상 진행과정에서 그렉시트를 감수한다는 확신을 채권단에 심어줬고, 더 나아가 그렉시트의 책임이 채권단에 있다는 분위기를 만들면서 협상의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다.

이제 관심은 시리자 정부의 게임전략이 최종 승리로 이어질지에 쏠리고 있다. 채권단에 535억유로의 구제금융 요구라는 강수를 들이댄 치프라스의 베팅이 과연 얼마나 먹힐지가 포인트다. 변수는 그리스의 취약한 금융시스템이다. 한 협상 전문가는 “지금까지는 그리스 국민들이 채권단의 긴축안 요구를 막아낸 치프라스 총리를 지지했지만 순식간에 태도가 바뀔 수 있다”고 말했다. 최종 협상이 실패로 끝나고 그리스가 그렉시트 수순을 밟고 이전의 ‘드라크마화(貨) 시대’로 돌아가면서 경제난이 심화될 경우 시리자 정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정권교체 요구가 거세질 수 있다는 분석이다. (끝)
/sg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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