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바로가기

뉴스인사이드

‘폴란드식 경제’ 이어받은 그리스

글자작게 글자크게 인쇄 목록으로

(김동욱의 역사읽기) 독일인들이 폴란드를 비하할 때 쓰는 표현으로 ‘폴란드(식) 경제(Polnische Wirtsschaft)’라는 말이 있다. 제대로 돌아가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허점투성이의 혼돈상태를 가리킬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 헬무트 콜 전 서독 총리가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와 대화 도중 무심히 발언해 외교문제로 비화된 적도 있다.

사실 이 표현은 17∼18세기 프로이센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면서 이웃 폴란드에 대해 “우리는 너희와 달라”라는 인식을 갖게 되면서 등장하기 시작했다. 당시 프로이센은 오늘날 폴란드 영토 한가운데인 그단스크(독일명 단치히)를 포함하는 동프로이센을 영토로 갖고 있어 폴란드와의 비교는 전혀 낯선 것이 아니었다.

특히 독일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 반면, 폴란드 지역은 낙후성을 벗어나지 못하면서 부터는 ‘폴란드식 경제’란 문구는 폴란드를 비하하는 용어로 널리 사용됐다. 시대에 뒤쳐진 폴란드와 선진적인 독일이라는 대비되는 이미지는 19∼20세기 동안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됐다.

이 문제를 오랫동안 천착해온 후베르트 오를로프스키라는 학자에 따르면 ‘폴란드식 경제’라는 표현은 독일의 학자이자 여행가였던 게오르크 포스터가 1784년 12월 쓴 편지에 처음 등장했다. 이어 ‘폴란드식 경제’란 표현은 독일 식자층 사이에서 무질서와 혼동, 실수, 의욕 없음, 경쟁력 상실, 비효율 등의 동의어처럼 사용됐다. 이 표현은 이후 독일 사회에서 널리 퍼지기 시작해 1863년 6월 한 신문에선 ‘왜소한 반동주의자’라는 형태로 의인화되기도 했다.

독일 계몽주의자들에게 있어 ‘폴란드식 경제’는 전근대 사회의 구습을 유지하고자 몸부림치는 폴란드 귀족층의 시대착오적 몸부림을 한마디로 요약하는 표현이었다. 나의 우월성과 상대의 열등성을 표현하는 방법은 ‘폴란드식 경제’라는 한마디를 외치면 끝이났다.

이어 제국주의 시대를 맞이하면서 ‘폴란드식 경제’는 프로이센과 독일의 특수한 발전상을 부각시키는 용어로 널리 활용됐다. 규율있고 질서가 잡혔으며, 근면하고, 검약이 몸에 뱄으며,깨끗한 독일적 특성을 부각시키는 대조적인 모습으로 ‘낙후되고 게으른’ 폴란드가 선택된 것이다.

이에 따라 ‘폴란드식 경제’라는 용어를 거침없이 사용했던 명사들 중에는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 오토 폰 비스마르크, 칼 폰 클라우제비츠 등 사상가와 정치가가 망라됐다. 독일 민족주의 정신을 고양시켰던 에른스트 모리츠 아른트나 구스타프 프라이탁, 하인리히 폰 트라이치케 등도 전형적인 폴란드인의 이미지를 구축하며 공격적으로 ‘폴란드식 경제’란 표현을 썼다.

이 표현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칼 폰 로테크 같은 자유주의 지식인 조차 이 표현을 거부하지 못했고, 페르디난트 라살이나 칼 카우츠키 같은 사회주의 혁명가들 마저 “폴란드인의 후진성이 폴란드에서 사회주의 혁명의 도래를 가로막고 있다”며 좌절하기도 했다.

20세기 들어서도 폴란드에 대해 적대적인 정책을 폈던 히틀러가 ‘폴란드식 경제’라는 표현을 폴란드인에 대한 탄압과 나치의 폴란드 침공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했다.

2차 대전 후에도 독일 사회에서 ‘폴란드식 경제’라는 표현이 가지고 있는 부정적 특성은 사라지지 않았다. 1987년 하인츠 쿠퍼라는 언어학자가 편집한 ‘독일 일상어 사전’에서도 ‘폴란드식 경제(Polnische Wirtsschaft)’라는 표현은 ‘주체할 수 없는 혼돈’이라는 뜻으로 풀이됐다.

하지만 21세기 들어 폴란드가 동유럽의 고도성장 주역으로 떠오르면서 ‘폴란드식 경제’는 이제 옛말이 돼버렸다. ‘폴란드식 경제’에서 폴란드가 차지하던 자리는 이제 그리스가 대체하는 모습이다. 언젠가 훗날에는 무분별한 복지, 방탕한 재정운영으로 비하되는 그리스 경제도 ‘폴란드식 경제’라는 말처럼 옛말이 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끝)

***참고한 책과 사이트***

Hubert Orlowski, ‘Polnische Wirtschaft- Ausformung eines hartnäckigen Vorurteils’(http://www.kulturforum-ome.de/pdf/1000355a.pdf)

임지현, 『바르샤바에서 보낸 편지』, 강 1998

오늘의 신문 - 2024.04.29(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