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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위원장이 '그립' 짧게 잡는 속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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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정 증권부 기자) 관가에선 공무원들의 성향을 표현할 때 ‘그립’이라는 단어를 많이 씁니다. 골프채나 야구방망이, 테니스라켓 등 스포츠 용구 잡는 것을 ‘그립’이라고 하는데요. 추진력 강한 공무원한테는 ‘그립을 세게 쥔다’고 표현하고요, 그렇지 않은 공무원에겐 ‘그립이 약해’라고 표현하더군요.

그런데 실무 능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뛰어나다는 임종룡 금융위원장에겐 ‘그립을 짧게 쥔다’는 표현이 따라다니고 있습니다. 채를 짧게 잡을수록 비거리는 짧아집니다. 임 위원장이 금융개혁을 외치며 쉴새없이 친시장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지만, ‘짧은 안타만 칠 뿐 홈런이 없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임 위원장이 지난 3월 16일 취임한 이후 100여일이 지났습니다. 임 위원장은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의 합동 현장 점검반을 통해 금융회사들의 세부적인 요구사항들까지 현장에서 직접 청취하고 있고요. 매주 금요일 실무자 위주로 꾸려진 시장 전문가들과 아침 회의를 하는 ‘금요회’를 하면서 역대 금융위원장 중 시장과의 소통이 가장 활발하다는 평가를 듣고 있습니다.

실무자들의 애로를 많이 청취해서 일까요. 임 위원장이 그동안 내놓은 금융개혁안 상당 수는 감독규정이나 거래소 규정, 협회 자율규정, 시행세칙 등을 개정하는 것입니다. 코넥스 시장 진입 완화나 미니선물 도입 등이 그랬습니다. 큰 그림을 그려 법을 개정하는 것은 찾기 어렵습니다.

이번주 공개되는 한국거래소 지배구조 개편방안만 해도 논의 과정에서 잡음이 많았는데요. 금융위는 한국거래소(KRX)를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는 방안과 코스닥시장본부만 거래소의 자회사로 내리는 방안, 두 가지를 놓고 고민해왔습니다. 금융위는 당연히 KRX의 지배구조를 다른 글로벌 거래소와 같이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해야한다고 판단하고 있으면서도 코스닥시장본부를 자회사로 만드는 것이 현실적 대안이라는 자본시장연구원의 연구용역 결과를 발표해 혼란을 자초하기도 했습니다.

거래소 지배구조 전체를 바꾸는 것은 법 개정 사항으로 국회를 거쳐야합니다. 이 때문에 법 개정없이 당장 할 수 있는 코스닥시장본부의 자회사화라도 먼저 하는 게 빠르지 않느냐는 취지에서 대안으로 함께 검토했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거래소의 근본적인 개혁을 기대할 수도 없고, 언제 다시 개혁을 하게될 지도 모르게 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말입니다.

많은 금융관련 정책들이 국회 변수 때문에 쪼그라들고 변형돼 추진되고 있습니다. ‘구더기 무서워 장 못담글 바에 뭐하러 정책을 추진하냐’는 말도 금융위 안팎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처음엔 임 위원장이 그립을 짧게 쥐는 것이 안전한 정책만 펴려는 ‘보신주의’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돌아가는 국회 상황을 보고 있자니 임 위원장이 그립을 짧게 쥘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저절로 이해되더군요.

2013년 발의된 후 정무위원회에서 표류한 지 2년여만에 지난 4월 말 가까스로 정무위 전체회의를 통과한 크라우드펀딩법이 정쟁에 밀려 또 좌초되고 말았습니다. 다음 달 1일 본회의에서 통과되지 않으면 이번 정권에선 어려울 것이란 관측이 나옵니다. 오는 9월 정기국회는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여야간 힘겨루기가 극에 달할 것이 뻔하고 총선이 끝나면 2017년에 있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선거모드’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한 금융위 공무원에게 취재하러 갔더니 “하 기자가 지금부터 쓰는 정책 기사들은 이번 정권에선 실현되기 어려울 거라고 보면 된다”고 초를 치더군요. 그 정도로 공무원들 사이에선 국회가 정책추진에 있어 엄청난 장애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국회가 행정입법에 대해 수정을 요청할 수 있도록 규정한 국회법 개정안을 두고 행정부가 이토록 강경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도 그동안 겹겹이 쌓인 ‘국회 트라우마’ 때문이란 생각도 듭니다.

정말 제가 앞으로 취재하게 될 정책기사들은 모두 실현 불가능한 정책이 되는 걸까요. 국회를 거치지 않고 시장이 요구하는 정책을 실현시킬 방법은 없는 걸까요.

요즘 가족과 배드민턴을 치곤 하는데요. 배드민턴 그립을 짧게 쥐고 강력한 스매싱을 날리는 방법에 대해 한번 연구해 봐야겠습니다. 정부 출입기자인 제가 앞으로 어떻게 먹고 살지 궁리도 해보면서 말이죠. (끝)

오늘의 신문 - 2024.05.22(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