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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구한 국가부채 문제 해결법 '배 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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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의 역사읽기) 서양사회에서 국가부채의 채무 불이행은 상당히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배 째라’ 식의 완전한 채무불이행은 중세 및 근대 초기에 군주들이 채무상환 비용이 재정수입의 큰 부분을 차지하자 흔히 쓰던 방법이었다.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는 1340년대 이런 방법으로 당시 이탈리아의 금융 ‘거인’인 바르디가와 페루치가를 쓰러뜨렸다. 15세기 프랑스 자본가로 왕실군대에 갑옷과 무기를 제공하고, 왕실창고와 가구창고 등 축재와 관련되는 것이면 무엇이든 손을 댔다는 자크 쾨르는 샤를 7세가 채무불이행을 단행하자 가장 큰 피해를 본 희생양이 됐다. 샤를 7세는 백년전쟁으로 피폐해진 프랑스를 재건하기 위해 자크 쾨르에게 돈을 빌렸는데 그 돈을 갚지 않으려고 자크 쾨르를 투옥해 버렸다. 동시에 그는 제노바 자본가들도 위기에 몰아넣었다.

에스파냐 펠리페2세는 부도 선언을 통해 푸거 가문을 뿌리째 흔들었다. 푸거가문의 대출금은 1510년 20만 플로린에서 16세기 중반 500만 플로린을 넘어설 정도로 급성장했지만, 에스파냐 합스부르크 왕조의 채무불이행 선언으로 순식간에 900만 플로린 이상의 손실을 볼 수밖에 없었다. 푸거가의 자본수익률도 1520년대에는 50%를 넘었지만 1550년대 5.5% 수준으로 떨어졌고, 1560년대에는 순손실로 전환될 수밖에 없었다.

펠리페2세 시절 에스파냐 재정을 복기해 보면 국가예산이 얼마나 위태위태하게 운영됐는지를 알 수 있다. 1562년 카스티야 후로스(장기국채) 이자지급으로 50만 두카트, 플랑드르 후로스 이자지급으로 30만 두카트가 지불됐다. 여기에 아라곤(5만 두카트), 시칠리아(15만 두카트), 밀라노(20만 두카트), 대서양 여러 섬들(3만 두카트) 후로스 이자지급 부담도 만만치 않았다. 전체적으로는 123만 두카트가 한해의 후로스 이자비용이었다.

1571~1573년 기간 에스파냐의 총 부채는 5000만 두카트에 달했고, 1581년에 베네치아 주재 에스파냐 대사는 본국의 부채가 총 8000만 두카트에 이른다고 언급했다. 각종 통계를 종합해 보면 펠리페2세는 20년 동안 국가부채를 네 배나 늘려 놨다.

1582년과 1583년에 펠리페2세는 연거푸 그의 재무 관련 각료들에게 보다 예측가능하고 안정적인 재정운영을 위해 적어도 2년 연속으로 제국의 자금흐름을 미리 파악한 예산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이를 위해 밀라노와 마드리드에 ‘전략적 비축금’으로 주화를 예비해 놓도록 했다. 하지만 잉글랜드와 관계가 악화되면서 기존의 계획으로 감당이 되지 않는 수준의 군사비가 지출됐다. 설상가상으로 펠리페 2세의 재정관련 이해도도 떨어졌다. 펠리페 2세는 각종 기록들을 통해 자주 “재정 관련 보고서를 읽고 또 읽어도 이해하기 어렵다”는 푸념을 남겼다.

1588년 무적함대의 잉글랜드 원정과 패배 등으로 재정상황이 급박해지자 펠리페2세는 매주 토요일마다 재무 관료들에게 현재 수중에 얼마나 있는지를 보고토록 했다. 때론 왕실 금고에 남은 자금 총액이 무적함대 하루 운영비용인 3만 두카트도 되지 않는 날도 허다했다.

1400년대 이전 유럽이 분권화 됐을 때는 국가재정이라는 것이 큰 의미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 이었다. 영주나 국왕이 알아서 자기영지에서 공물, 지대, 부과금, 이용료 등을 거뒀다. 국왕들도 개인 명의로 토지를 담보로 돈을 빌렸다.

하지만 16세기 이후로는 전쟁이 대규모화되고 국가 재정지출이 급속히 늘면서 국가가 예산과 세금, 재정을 제도화했다. 프랑스 대혁명 직전 재무총감 네케르에 따르면 프랑스 국가지출 중 3분의 2는 군대에 할당됐다. 1529년 이전 이탈리아에서 동원된 합스부르크 에스파냐의 군대는 3만명을 넘지 않았지만 1536~1537년에는 6만명이 프랑스와 전쟁을 위해 동원됐고, 1552년에는 15만명이 칼5세 휘하에 있게 됐다. 17세기에 들어서면 합스부르크제국은 플랑드르 지역에서 네덜란드와 80년 가까이 대립하면서 연평균 6만5000명의 군대를 해외에 배치했다. 인구의 7%에 해당하는 1만2000명을 효율적인 용병으로 양성해 짭짤한 수익을 거뒀던 18세기 헤센-카셀 같은 조그만 영방국을 제외하면 막대한 전비가 드는 대규모 전쟁은 대부분의 국가에게 큰 부담이었다.

실제 1600년 프랑스 일반 노동자의 세금 부담은 연간 50시간 노동시간분에 해당했다면 1963년에는 세 부담이 700시간분 노동에 해당할 정도로 근대국가 발전과 함께 재정의 발달에 따른 세 부담 증가는 역사의 일반적인 추세였다.

여기에 이베리아 반도를 시작으로 이탈리아 지역까지 상업 도시국가 들이 사라지거나 미약해지면서 중앙집권화 된 유럽 주요국은 장기 채권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렇게 국가재정이 정교해 졌다고 해서 ‘채무 불이행,이나 ‘파산’이라는 위험한 지뢰밭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근대에 접어들면서 채무불이행이 너무 자주 일어나 사실상 “제도화 됐다”는 표현까지 나왔다. 국가가 파산했다는 표현 보다 모라토리엄이나 채무재조정(rescheduling), 강제전환(forced conversion) 등의 용어로 이 같은 채무불이행 사태가 순치되고, 세분화 되고, 덜 무섭게 포장됐을 뿐이다.

에스파냐는 1556~1696년 사이에 14차례에 걸쳐 채무의 전부 또는 일부를 이행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1557년 칼5세는 바야돌리드 칙령을 통해서 장기국채인 후로스의 금리를 5%로 동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562년 에스파냐 왕실은 1년 예산의 4분의1에 해당하는 143만 두카트를 국가부채의 이자를 갚는데 써야만 했다. 에스파냐 정부는 오늘날 미국 정부가 글로벌 금융위기 대응전략으로 ‘오퍼레이션 트위스트(미국 중앙은행이 장기 국채를 사들이는 대신 단기 국채를 내다 팔아 장기 금리를 낮추는 정책)’정책을 쓴 것처럼 단기융자 채무인 아시엔토스를 장기국채인 후로스로 전환하는 방법을 주로 사용했다.

하지만 1625년 최고조(1240만 두카트)에 달했던 아시엔토스(단기융자 채무) 규모가 1654년에는 100만 두카트로 줄어들면서 재정정책을 사용할 수단이 거의 사라져 버렸다. 결국 국채 만기연장이나 반 강압적인 국채금리 인하, 금가격 인상 등으로 대응해도 한계에 다다르면 부도를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이 당시 에스파냐 정부가 완전 채무불이행을 선언한 것만 따져 봐도 1575년, 1576년, 1607년, 1627년, 1647년에 이른다.

근대 초기 프랑스도 정기적인 채무 불이행국가 중 하나였다. 앙리4세는 “대금업자들을 스펀지처럼 쥐어짰다”는 평을 들었지만 빌린 돈을 갚는 데는 모범적이지 않았다. 앙리4세 이후 프랑스 국왕들도 줄줄이 금융업자들에겐 ‘큰 구멍’이었다. 프랑스 왕정은 1559년, 1598년, 1634년, 1648년, 1661년, 1714년, 1721년, 1759년, 1770년, 1788년에 빚을 갚지 않고 ‘펑크’를 냈다.

에스파냐와 프랑스 등에선 채무불이행이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한 행보였다. 전쟁을 위해 돈을 빌리고, 빚을 갚기 위해 세금을 올리려 하지만 시끄러운 소요만 일으킬 뿐 실패했다. 또다시 채무를 갚기 위해 더 많은 돈을 빌리고 하다가 결국 최종적으로는 전체 혹은 일부 빚에 대한 채무불이행을 선언하는 형태가 반복된 것이다. 삼부회 소집으로 프랑스 대혁명의 도화선을 당길 때도 루이16세가 제기한 주요 안건은 채무불이행과 관련된 것이었다.

재정위기에 직면한 국가들은 세금을 쥐어짜 부도를 피해보려 했지만 시민들의 엑소더스만 발생할 뿐 파국은 피하지 못했다. 1582년 합스부르크 제국의 행정 모범지대로 평가받던 피렌체에서 세금부담이 늘자 주민 대량 탈주 사태가 발생했다. 에스파냐의 지배를 받았던 포르투갈에선 모든 물품에 20%의 판매세가 부과됐다. 수산물에 대해선 무려 판매액의 50%가 세금이었다. 1587년 프랑스 부르봉 왕가는 흉작으로 지역 경제 기반이 엉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파리에서의 조세수입을 두 배로 증액하는 방안을 진지하게 고려했다.

상대적으로 재정이 건전했다던 영국도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1672년 찰스2세는 부분적인 지급불이행을 선언했다. 1685년에는 국채이자 지급이 중단돼서 1705년 까지 재개되지 않았다. 잉글랜드에선 또 1707~1708년, 1716~1717년, 1727년, 1749~1750년, 1756년, 1822년, 1824년, 1830년, 1844년에도 소지하고 있던 국채를 액면이자가 낮은 증권으로 교환하는 강제 전환(forced conversion)이 시행됐다.

이 같은 국가부도는 전 유럽적 현상이 됐다. 독일 유력일간 프랑크푸르터알게마이네차이퉁 분석에 따르면 1800년부터 2010년까지 그리스는 무려 5번의 국가부도 사태를 경험하며 100년 넘게(전체 기간의 51%) 파산 상태에서 국가가 운영됐다. 러시아도 39%(5번)의 기간을 국가부도 상황에서 보냈다. 헝가리(37% · 7번)와 폴란드(33% · 3번) 등도 3분의 1 이상의 세월을 부도 하에 흘려보냈다. 오늘날 재정이 튼실하기로 유명한 독일도 7번의 파산과 13% 기간에 달하는 국가부도를 경험했다.

이처럼 근대 초 이래 유럽 국가에선 채무불이행이 반복되면서 국채는 더 높은 금리로 발행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결국 갚아야 할 빚이 더 늘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오늘날 몇 년째 재정위기를 겪고 있는 유로존 처럼 당시 유럽 주요국들도 빚으로 빚을 갚다 결국 배를 째는 악순환의 고리는 쉽게 끊을 수 없었던 것이다. 5년 가까이 끌어온 그리스 재정위기가 막바지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 그리스의 채무불이행(디폴트)과 유로존 탈퇴(그렉시트) 가능성도 높아졌다. 악화된 그리스 사태를 바라보며, 유구한 국가부채 ‘배 째기’의 역사를 다시 되짚어 봤다.(끝)

***참고한 책***

니알 퍼거슨, 『현금의 지배-세계를 움직여 온 권력과 돈의 역사』, 류후규 옮김, 김영사 2002

페리 엔더슨, 『절대주의 국가의 역사』, 김현일 外 옮김, 소나무 1993

‘국가부도? 유럽선 '흔한 일'’, 한국경제신문 2010년 3월 15일자

Fernand Braudel, 『The Mediterranean and The Mediterranean World in the Age of PhilipⅡ Vol.1』,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5

Geoffrey Parker, 『The Grand Strategy of Philip Ⅱ』, Yale University Press 2000

Roger Lockyer,『Habsburg and bourbon Europe 1470~1720』, Longman 1993

Douglass C. North and Robert Paul Thomas,『The Rise of the Western World- A New Economic History』,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5

Charles Tilly,『Coercion, Capital, and European States AD 990~1992』, Blackwell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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