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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펀드 10년 ‘진화하는 투자 트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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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견그룹 통째 인수하고 자체 브랜드 개발, 외식업·인증 등 전문화도

(이홍표 한경 비즈니스 기자) 사모펀드(PEF)가 한국에서 자리 잡기 시작한 지 10여 년이 흘렀다. 그동안 사모펀드는 액수 기준으로 128배나 커졌다. 규모가 커진 만큼 경쟁도 치열해졌다. 2004년 단 두 개였던 사모펀드는 작년 말 기준으로 277개까지 늘어났다. 이에 따라 각 사모펀드들의 투자 패턴에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기존에는 부실기업을 사들인 후 정상화시켜 되파는 바이아웃이 대부분이었다면 최근에는 보다 특색 있는 투자가 이뤄지고 있다. 사모펀드의 최신 투자 트렌드를 알아봤다.

국내 사모투자펀드(PEF)가 태동한 것은 1998년 간접투자자산운용법이 제정되면서부터다. 이후 2004년 간접투자자산운용법 개정안이 마련되면서 본격적으로 자본시장에 발을 디뎠다. 사모 펀드는 초기만 해도 부실기업을 인수해 경쟁력을 키운 뒤 팔아치우는 바이아웃(Buyout)이 대다수였다.

그러나 지금은 명실상부하게 사모펀드가 자본시장의 한 축을 형성했다는 평가다. 외환 위기 이후 자본시장 개방과 동시에 적대적 인수·합병(M&A)이 전면 허용되자 물밑에 있던 거대 자본이 유입되면서 사모펀드가 국내외 기업이나 금융회사 M&A의 주체가 되거나 재무적 투자자(FI)로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4월 26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2014년 말 기준 국내에 설정된 PEF 누적 약정 잔액은 51조2000억 원 규모다. 2004년만 해도 액수는 4000억 원에 불과했다. 128배나 늘어난 것이다. 이 중 실제로 기업에 투자된 규모는 46조 원, 690개 기업에 달한다. 사모펀드의 수도 크게 늘었다. 2004년 2개에서 2014년 말 277개로 275개가 늘었다.

경쟁 더 심해지는 사모펀드 업계
규모가 커지면서 활동 영역도 넓어졌다 있다. 최근 한앤컴퍼니가 한국타이어와 함께 세계 2위 자동차용 공조장치 제조 기업 한라비스테온공조를 인수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M&A뿐만 아니라 기업의 자금난 해결사로도 종종 등장한다. 현대상선의 벌크전용선사업부 및 해외 항만 터미널 3곳의 유동화와 관련해 유안타증권은 “해당 자산에 투자하는 사모 투자 전문 회사의 업무집행사원(GP:무한책임사원)으로 참여하는 것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해외시장에도 차츰 눈을 돌리고 있다. 롯데그룹은 국민연금과 함께 총 1조 원 규모의 해외 M&A 지분 투자용 PEF를 설정했다.

규모가 커지고 영역이 넓어지면서 경쟁도 치열지고 있다. 당연히 각 사모 펀드들도 생존 전략을 짜면서 일종의 ‘투자 트렌드’가 감지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게 사모 펀드들의 ‘외식업 사랑’이다. 외식업은 일반 제조업보다 상대적으로 회사 규모가 작고 프랜차이즈 등을 통해 매출을 키우기도 좋다. 또한 ‘현금 장사’이기 때문에 4~5년 후 재매각 때도 유동성 확보가 쉽다.

작년 9월 외식 업계에 따르면 썬앳푸드가 운영하는 매드포갈릭은 스탠다드차타드의 사모 펀드인 SCPE로부터 500억 원 투자 유치에 성공했다. 매드포갈릭은 마늘을 기본으로 한 다양한 이탈리아 요리와 와인을 판매하는 레스토랑이다. 국내 30개, 해외 4개의 매장을 운영 중이다. 이번 투자 유치로 매드포갈릭을 비롯해 여러 외식 브랜드를 보유한 썬앳푸드는 별도 법인인 MFG코리아를 세워 매드포갈릭을 집중 육성할 계획이다.

사모 펀드가 외식업 사랑을 시작한 것은 201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모 펀드는 당시 한식 브랜드 놀부를 인수하며 일약 외식 업계의 큰손이 됐다. 놀부를 인수한 곳은 미국 모건스탠리다. 모건스탠리는 당시 글로벌 금융 위기 여파로 국내 M&A 시장이 얼어붙자 ‘현금 장사’인 외식 프랜차이즈로 눈을 돌렸다.

이후 2013년부터 사모 펀드의 외식업 공략이 본격화됐다. 버거킹코리아와 BHC치킨·할리스커피·크라제버거·KFC코리아 등 가맹 사업을 하는 패스트푸드와 커피 전문점을 집중적으로 사들였다. 불과 3년 새 사모 펀드가 인수한 국내 외식 브랜드는 8개로 투자한 금액만 5600억 원을 넘어섰다.

주목할 점은 사모 펀드들이 외식업에 진출한 후 각 기업들의 실적이 크게 좋아진 것이다. 놀부의 2014년 매출액은 1212억 원으로 인수 당시보다 53%나 늘어났다. 같은 기간 영업이익도 13억 원에서 43억 원으로 3배가 늘었다. 햄버거 체인인 버거킹을 운영하는 비케이알도 2012년 말 국내 사모 펀드인 보고펀드에 인수된 뒤 1년 새 매출이 20% 넘게 늘어났다. 치킨 프랜차이즈 업계 1위 BBQ의 자회사였던 BHC도 2013년 씨티그룹에 매각된 후 매출이 2배 정도 불었다. 2013년 IMM으로 주인이 바뀐 할리스커피도 1년 만에 매출이 100억 원 넘게 늘었고 KFC코리아 역시 매출이 전년보다 50억 원 이상 늘었다.

‘시험 인증 회사’에 공들이는 스카이레이크
매출 확대의 비결은 경영 합리화다. 놀부는 모건스탠리 인수 이후 최고경영자(CEO)·최고전략책임자(CSO)·최고재무책임자(CFO)·최고운영자(COO)로 이뤄진 4C 체제를 외식 업계 최초로 도입했다. 경영진도 코카콜라·네슬레·CJ 등 글로벌 기업과 국내 대기업 출신으로 꾸렸다. 직영 체제만 고수하던 버거킹은 가맹점 체제를 도입했다. 2014년에 늘어난 매장만 37개다. 또 배달 시스템도 도입했다. BHC도 비슷하다. 예를 들어 배송 트럭에 자동 온도 조절 장치와 위성항법장치(GPS)를 설치하면서 원료의 품질을 높였다.

이 가운데 사모 펀드의 투자법도 살짝 달라졌다. 과거에는 지분 100%를 사들여 경영권을 완전히 틀어쥐는 방식이 주가 됐다. 하지만 매드포갈릭은 기존 오너의 경영권을 유지해 준 후 자본과 시스템을 보완해 주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또 지난해 유니슨캐피탈에 의해 인수된 대만계 밀크티인 ‘공차’ 역시 기존 오너의 지위를 유지해 준 후 그와 함께 일본에 진출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사모 펀드의 투자 트렌드 중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전문화’다. 사모 펀드의 기본 개념은 단순하다. 소수의 투자자로부터 자금을 모아 돈이 될 만한 곳에 투자하는 것이다. 대상은 주로 ‘기업’이다. 그런데 하나의 사모 펀드가 여러 업종에 투자하다 보면 비효율이 발생할 수도 있다. 그러니 하나의 업종에 집중 투자해 해당 업종에서 규모의 경제를 이루는 것이다. 이런 방식의 투자에 가장 앞서나가고 있는 사모 펀드는 진대제 전 정보통신부 장관이 이끄는 스카이레이크인베스트먼트(이하 스카이레이크)다.

스카이레이크인는 최근 전기·전자 분야 시험 인증 관련 기업 4곳을 잇달아 M&A했다. 스카이레이크는 지난해 9월 전자기기 시험 인증 전문 업체인 이엠씨컴플라이언스를 인수해 관련 업체 M&A를 시작했다. 이엠씨컴플라이언스는 2011년 설립돼 2014년 매출 105억 원(영업이익 21억 원)을 올린 업체다. 국내 기업 중 지난해 매출 274억 원(영업이익 92억 원)을 기록한 코스닥 상장사 디엔티씨에 이어 업계 2위다.

스카이레이크는 올해도 꾸준히 이 분야에 투자하고 있다. 지난 2월에는 국내 민간 인증 시험 업체 1호 회사인 한국EMC연구소를 인수했다. 이곳은 방위산업과 자동차 인증 분야 국내 1위 업체로 꼽힌다. 여기에 더해 과거 대우전자에서 분사한 전기·전자 관련 안전 및 오디오 부문 전문 시험 업체 A사도 인수를 추진 중이고 의료기기 인증 업체인 B사 인수도 마무리 단계다.

스카이레이크는 인증 업체 중 분야별 경쟁력을 갖춘 기업을 각각 인수해 하나의 집단을 만든다면 기업들의 니즈에 대응하기가 수월해질 것으로 보고 있다. 스카이레이크 관계자는 “인증 시험 시장은 과거 정부 주도 시장이었다가 최근 민간에 개방돼 빠르게 확대되는 추세여서 시장 선점을 위해 이 같은 전략이 필요했다”며 “미국 UL, 독일 TUV, 스위스 SGS 등 글로벌 인증 업체들이 국내시장 진출에 나서는 만큼 이들과 맞서기 위해서라도 동시다발적인 M&A를 통해 일정 규모를 갖춰야 된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국내 전자제품 관련 시험 인증 시장은 스마트폰, 사물인터넷(IoT), 자동차 전장, 의료 기기 등 관련 산업 발달로 시장 규모가 연간 10% 이상 성장 중이다. 현재 시장 규모는 4000억 원 정도다. 정부도 인증 산업 육성에 긍정적이다. 정부는 지난해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국가기술표준원을 중심으로 에너지 저장 장치(ESS), 자동차, 조선 해양 플랜트 분야 등 16대 유망 시험 인증 서비스를 발표하고 서비스별 상용화를 독려 중이다.

스카이레이크가 인증 부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루터어소시에잇코리아(이하 루터PE)는 제조업 기반으로 ‘브랜드화’를 시작하고 있다. 루터PE는 올해 2월 전동공구와 차량용 모터 전문 생산 업체 계양전기 지분 6.25%를 인수해 2대 주주로 올라섰다. 또 지난해 말에는 차량 등에 사용되는 산업용 고무 부품 전문 회사인 동아화성의 지분 6.38%를 코스닥에서 시간외 다량 매매 방식으로 인수해 2대 주주가 됐다.

주목할 점은 루터PE가 두 기업 투자에 ‘케이머스원’이라는 같은 이름을 내걸었다는 것이다. ‘케이머스원’은 루터PE가 소재·부품 기업 투자 목적으로 새롭게 도입한 브랜드다. 국내 사모 펀드에서는 사실상 첫 시도다.

승계보다 매각하는 창업주 늘어나
루터PE는 브랜드화를 통해 투자 기업에 대한 인지도를 높이고 기업 가치도 끌어올리는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구상이다. 올해 상반기 중 1~2곳 정도 기업에 대한 추가 투자를 마무리한 후 케이머스원이란 이름으로 투자한 기업을 한데 모아 기업설명회(IR)도 개최할 계획이다. 루터PE 관계자는 “케이머스원으로 투자한 소재·부품 회사들이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 않아 성장성에 비해 저평가되거나 소외돼 왔다”며 “‘케이머스 클럽’이라는 공동체를 만들어 1년에 한두 번 정도 공동 IR를 열고 투자자들에게 회사를 적극적으로 알리는 방안을 추진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앞으로 사례가 점차 많아질 것으로 예상되는 트렌드도 있다. 바로 사모 펀드가 중견기업집단 자체를 ‘통째로 인수’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사모 펀드가 해 온 대부분의 투자들은 대기업 계열사 중 한 기업이나 한 사업부를 인수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아예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기업집단 전체를 인수하는 것이다.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최근 사회적으로 대두되고 있는 상속·증여 때문이다. 막대한 상속세를 내기 어려운 오너 일가가 아예 기업집단 전체를 사모 펀드에 팔아 투자금을 현금화하는 것이다. 사모 펀드도 나쁠 건 없다. 대부분의 기업집단은 핵심 사업과 관련 사업을 중심으로 이뤄져 있어 ‘시너지’가 있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지난 5월 한국 1위 포장재 업체인 태림포장공업그룹이 사모 펀드 IMM에 팔렸다. 40년 업력의 중견그룹 창업주가 형제나 자녀에게 경영권을 물려주는 대신 회사 매각을 선택한 것이다. 향후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기업이 쪼개지거나 가치가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태림포장공업그룹은 5월 6일 대주주인 정동섭 회장 일가가 보유한 지분 58.9%를 IMM에 매각하는 주식 매매 계약서를 체결했다고 공시했다. 태림포장공업그룹 자회사인 동일제지 지분 34.54%도 IMM에 팔기로 했다. 태성산업·월산·비코·동림로지스틱 등 태림포장공업과 동일제지 핵심 자회사 다섯 곳도 IMM이 사들인다. 정 회장이 1976년 창업한 태림포장공업은 골판지 제조와 포장을 중심으로 14개 계열사를 거느린 중견 그룹이다. 지난해 매출은 3520억 원, 순이익은 179억 원이다.

정동섭 태림포장공업 회장은 일가가 대거 경영에 참여하는 상황이 그룹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해 회사 매각을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 회장 동생인 정영섭 부회장은 동일제지와 월산 대표, 장남인 정상문 사장은 태림포장공업 대표, 차남인 정유천 사장은 제이타우젠트 대표를 맡고 있다. 두 명의 사위도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주력 회사인 태림포장공업은 정 회장 지분(6.67%)보다 정 부회장(4.89%)과 정상문 사장(18.27%)의 지분이 더 많다. 업계 관계자는 “경영권 승계를 목전에 둔 중소·중견그룹이 늘고 있다”며 “미국 등 선진국처럼 경영권을 자녀에게 물려주지 않고 제삼자에게 매각하는 사례가 늘어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보다 앞서 농우바이오 등도 경영권 승계를 포기하고 사모 펀드에 매각했다. 지난해 농우바이오는 사모 펀드인 IMM PE와 스틱인베스트먼트가 매각 입찰에 참여했지만 농협경제지주가 최종 인수자로 선정됐다. 농우바이오는 고희선 회장이 1967년 창업한 후 국내 시장점유율 1위의 종자 업체였지만 고 회장의 갑작스러운 사망 이후 상속세 문제와 함께 미망인이 적절한 제삼자에게 회사를 매각하는 것이 종자 주권을 지키는 길이라고 판단해 매각됐다. 고 회장도 생전에 “회사의 발전이 가족 경영을 지속하는 것보다 먼저”라는 뜻을 피력했다고 한다.

‘CEO 시장’ 만드는 사모 펀드…파격적인 인센티브 ‘매력’
사모 펀드 시장이 급성장하면서 사모 펀드가 인수한 회사들을 운영하는 전문 경영인 시장이 열리고 있다. 이른바 ‘C레벨(CEO, CFO 등)’의 전문 경영인들은 스톡옵션(주식매수청구권) 등 파격적 연봉에다 창업주의 간섭 없이 자유롭게 경영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을 느끼고 있다.

칼라일이 인수한 ADT캡스는 최진환 대표가 이끌고 있다. 베인앤드컴퍼니 출신인 최 사장은 2009년 현대캐피탈 전략기획본부장을 시작으로 정태영 사장과 함께 현대캐피탈을 업계 수위로 끌어올린 ‘공신’으로 꼽힌다. 2012년엔 현대캐피탈이 인수한 녹십자생명을 현대라이프로 이름을 바꾼 뒤 그해 5월부터 사장직을 맡아 왔다. ADT캡스는 남용 LG전자 전 부회장, 황우진 푸르덴셜생명 전 사장 등 최고 수준인 전문 경영인들이 포진해 있다.

MBK파트너스가 주인인 코웨이도 ‘C레벨’을 영입했다. 삼성전자 가전사업부에서 마케팅 귀재로 이름을 날린 박용주 상무를 마케팅본부장으로 선임했다. 또 코웨이는 최고재무책임자(CFO)도 엔씨소프트에서 재무를 총괄하던 이재호 부사장을 영입했다. 사모 펀드 운용사 한앤컴퍼니는 옛 한진해운 벌크 전용선 사업 부문인 에이치라인해운 신임 대표에 현대상선 출신인 이영준 전무를 영입했다.

전문 경영인들도 사모 펀드가 소유한 회사를 맡는 데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가장 큰 요인은 높은 인센티브다. 사모 펀드 운용사 대표는 “연봉도 연봉이지만 스톡옵션을 통해 사모 펀드가 회사를 재매각할 때 막대한 수익을 거둘 수 있다”고 귀띔했다.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내보일 수 있는 것도 매력이다. 한 기업인은 “대기업에선 창업주가 무엇을 생각하는지가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이라면 사모 펀드가 투자한 회사를 운영할 땐 무엇이 가장 효율적인지만 생각한다”고 차이를 설명했다. (끝)

사진. 한경비즈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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