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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카에 당한 오바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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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진 국제부 차장) 지난 12일(현지시간) 미국 하원에서 TP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관련 법안의 통과가 무산되면서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됐습니다. ‘레임덕’(lame-duck·집권말 권력누수현상)이 아니라 ‘데드덕’(dead-duck·집권말 권력을 아예 쓸 수 없는 상황)으로 가는 것 아니냐는 얘기까지 나옵니다.

무역법안 하나가 통과 안 된 것 뿐인데 왜 그럴까요. TPP는 미국과 일본 호주 등 태평양 연안 12개국의 시장을 개방하는 다자간 자유무역협정(FTA)입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중국 견제를 위해 추진중인 ‘아시아로의 선회(pivot to Asia)’ 정책의 핵심 사항 중 하나입니다. 오바마는 아시아에서 급부상하고 있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외교·안보적으로는 일본과 방위협력을 강화하고, 경제적으로도 중국을 뺀 11개 나라와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해 공동체적 집단 견제시스템을 갖춘다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TPP협상 타결은 오바마 케어, 이란 핵협상 타결과와 함께 오바마 집권 후반기 핵심 과제로 꼽히고 있습니다.

오바마는 지난달말 TPP 관련 법안이 상원을 통과한 후 하원에 많은 공을 들였습니다. 대통령 전용기(에어포스원)에 TPP타결에 부정적인 민주당 의원들을 태워 야구 경기장에 같이 가기도 하고, 다음 선거 때 유세를 돕겠다는 약속도 했습니다. 투표 직전에 의사당에 들러서 (2년내 처음으로) 의원들에게 법안 통과를 부탁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TPP 관련 법안 두 개 중 하나인 무역조정제도(TAA)법안이 반대 302표, 찬성 126표의 압도적 표차로 부결됐습니다. 민주당 소속 의원들이 반대쪽에 대거 표를 던졌습니다. 민주당 하원 원내대표인 낸시 펠로시는 투표직전 연설에서 “무슨 협정이든 미국 근로자들에게 이로운 협정이어야 한다”며 반대표를 유도했습니다.

왜 민주당 의원들은 같은 당 소속 대통령이 그처럼 공을 들이는 TPP 관련 법안 통과를 막았을까요. 뉴욕타임스와 이코노미스트등 외신들은 여기엔 복잡한 정치적 셈법이 작용하고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반대표를 던진 민주당 의원들이 명분으로 내세우는 것은 TPP같은 다자간 자유무역협정으로 미국 근로자들이 일자리를 뺏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원 개인적으로는 TPP와 일자리를 직접적으로 연결해 생각하는 의원이 거의 없다고 미 언론들은 전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표(票)’입니다. 미 노조와 극좌 시민단체들이 표결을 앞두고 민주당 의원들을 협박한 것입니다. 특히 전미자동차노조(AFL-CIO)의 리처드 트럼카 위원장은 민주당 의원들에게 편지를 보내 TPP 관련 법안에 찬성표를 던질 경우 후원 중단과 함께 낙선운동도 불사하겠다고 협박했다는군요.

이 같은 협박이 먹히는 이유는 대통령 선거과 중간 선거(한국의 총선)때 민주당 지지층 비중이 바뀌는 데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미 대선 때는 자유무역협정에 찬성하는 젊은 유권자층과 비백인층 유권자들이 선거에 대거 참여해 민주당 후보의 득표율을 높여줍니다. 그러나 지자체장과 상·하의원 등을 뽑는 중간선거 때는 상황이 달라집니다. 이들의 투표율은 떨어지고, 블루칼라 계층의 민주당 지지율이 확 올라갑니다.

2018년 중간선거를 치러야 할 민주당 의원들로서는 노조를 신경쓰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실제로 지난해 중간선거에서도 블루칼라층의 냉담한 반응으로 민주당이 선거에 패배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임기를 1년여 앞둔 대통령의 치적을 챙기고, 국가 경쟁력을 생각하기보다는 3년후 돌아 올 자신들의 선거(2018년11월)를 먼저 챙겨야 하는 상황이 된 거죠.

뉴욕타임스는 “미국의 우방국들은 이 같은 미 정치권의 정치 프로세스를 보며 실망할 것이고, 중국은 조용히 웃고 있다”며 “미국은 우방국이나 중국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할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다”고 보도했습니다. /psj@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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