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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업문제 해결한 슈뢰더 전 독일 총리의 조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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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정 대타협 대신 ‘하르츠위원회’ 구성, 노동시장 개혁 성공 이끌어

(이정흔 한경 비즈니스 기자) 2005년 독일의 실업률은 11.7%에 달했고 실업자 또한 500만 명을 넘어섰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현재 독일의 실업자는 280만 명까지 줄었고 실업률 또한 6.4%로 낮아졌다. 이 변화의 중심에는 독일의 노동시장 개혁을 골자로 한 ‘어젠다 2010’이 있었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총리는 2003년 바로 이 ‘어젠다 2010’을 발표하며 독일 경제를 지금의 성공으로 이끈 주역으로 평가받는다. 지난 4월 8일 노사정 대타협에 또다시 실패하며 노동시장 개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국으로서는 독일의 이 같은 ‘성공 방정식’에 큰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다.

한국경제연구원(이하 한경연)이 주최한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총리 특별 대담:독일 어젠다 2010의 경험과 한국에 주는 조언’ 행사가 서울 여의도 전경련 회관에서 4월 21일 개최됐다. 이 자리에는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와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허창수 전경련 회장 등이 참석해 독일의 성공적인 노동 개혁 과정에 대한 높은 관심을 보여 줬다. 이날 대담에 앞서 특별 강연을 가진 슈뢰더 전 총리는 “어젠다 2010의 핵심은 노동시장의 유연성이었다”며 “임시직과 시간제 근로를 많이 늘리고 해고보호법을 개혁했으며 연금 수령 연령을 67세로 높여 연금 재정 문제를 해결했다”고 설명했다.

대담에 참여한 권태신 한경연 원장, 박재완 기획재정부 전 장관, 방하남 고용노동부 전 장관은 한국의 노동시장과 관련해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슈뢰더 전 총리 역시 자신의 경험을 담아 답변을 이어 갔다. 이와 함께 한국 경제에 대한 제언도 아끼지 않았다.

“개혁은 위에서부터 아래로”
권 원장 어젠다 2010의 성공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하르츠위원회’다. 독일이 노동시장 개혁을 이끌어 가기 위해 ‘노사정 대타협’이라는 방식 대신 하르츠위원회라는 ‘전문가 집단’을 활용한 이유는 무엇인가.

슈뢰더 전 총리 하르츠위원회는 쉽게 말해 독일 정부를 위해 개혁안을 마련해 주는 역할이었다. 일종의 연방 총리를 위한 ‘자문위원단’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르츠위원회를 구성하기 전 노사정위원회를 시도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노동동맹’이라는 이름을 걸고 정부·노조·사측이 한 테이블에 모여 노동시장 개혁을 위한 논의를 펼쳤다. 하지만 잘되지 않았다. 노조와 사측 모두 서로 양보하려거나 타협하려고 하지 않고 정부에 요구 조건만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방식으로는 노동시장 개혁을 위한 타협점을 찾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했다. 개혁은 ‘아래에서부터 위’가 아닌 ‘위에서부터 아래’로 이뤄져야 한다. 그래서 하르츠위원회를 구성해 ‘어젠다 2010’을 위한 노동시장 개혁안을 마련해 줄 것을 요구했다. 독일 정부는 이 개혁안을 바탕으로 노동개혁법안을 입법화하고 실질적인 개혁을 추진한 것이다.

박 전 장관 실제로 하르츠위원회는 대다수가 전문가들로 이뤄져 있었고 노조와 사측 대표는 옵서버(관찰자) 역할에 머물렀던 것으로 알고 있다. 현재 우리 역시 한국 경제의 체질 개선을 위해 노사문제를 포함해 다양한 개혁을 진행하고 있다. 그렇다면 합의안을 도출하기 위해서는 우리 역시 이해 당사자의 의견을 최대한 많이 듣고 수용하되 결정 과정에서는 이들을 배제하는 것이 맞는가.

슈뢰더 전 총리 개혁을 이뤄 내는 방식에는 ‘한 가지 정답’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네덜란드는 1980년대 경제가 어려워지자 노측과 사측이 만나 합의를 이뤄 내는 데 성공했다. 노사 합의는 개혁을 위해 굉장히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노사가 절박함을 갖고 개혁을 원해야만 가능한 방법이기도 하다. 독일은 노사정위원회를 시도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래서 정부가 책임지고 주도하는 게 맞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당시 총리를 지내며 개인적으로 경험한 바에 따르면 독일은 이 방식이 훨씬 더 효율적이고 빨랐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상황을 봤을 때 노사가 합의해 개혁안을 만드는 방안은 지금까지는 ‘실패’라고 볼 수 있다. 개혁을 위해 노사정 합의 외에도 다양한 방법을 고민해 봐야 할 때다.

노동시장 양극화, 최저임금제로 보완
박 전 장관 최근의 독일 경제는 하르츠 개혁을 통해 높은 성과를 이뤄 냈음에도 불구하고 부정적인 신호 또한 나타나고 있다. 임시직과 시간제 근로제, 저임금 미니 잡이 확산되면서 소득 시장에 불평등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 대표적이다. 현재 독일 정부(앙겔라 메르켈 총리)에서는 이 같은 문제들을 어떻게 보완하면서 국가 정책을 이끌어 가고 있는가.

슈뢰더 전 총리 물론 모든 개혁에는 그림자가 있기 마련이다. 독일 노동시장도 저임금 업종이 많이 양산된 것은 사실이다. 어젠다 2010의 노동정책 중에는 몇 가지 수정이 필요한 부분이 분명 존재하며 실제로 수정을 거친 정책 또한 적지 않다. 앞서 말했듯이 독일의 노동시장에는 생계를 위해 충분한 소득을 벌지 못하는 직종들이 있다. 이 때문에 독일은 2015년부터 ‘최저임금제’를 법으로 도입했다. 사실 독일의 중소기업들은 최저임금보다 훨씬 많은 임금을 지급하고 있다. 그러나 최저임금조차 제대로 지급할 수 없는 몇몇 직종에 대해서는 국가가 개입해 지원해야 한다. 이것이 복지가 제대로 작동하는 국가의 모델이다.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지키면서 최저임금제를 조합해 그 부작용을 줄여 나가는 방안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권 원장 현재 한국 경제는 청년 실업이 심각하다. 한국의 청년 실업을 줄이기 위한 조언을 부탁한다.

슈뢰더 전 총리 독일은 어젠다 2010을 통해 과거 ‘노동청’의 이름을 ‘잡센터(Job center)’로 바꿨다. 이름만 바꾼 것이 아니라 일하는 방식도 많이 바꿨다. 기존에는 노동청을 찾아온 실업자에게 단순히 일자리를 알선해 주는 데 그쳤다면 잡센터에서는 실업자에 대한 정확한 분석을 가장 먼저 실시한다. 사람의 자질이나 전문적 능력 등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이를 바탕으로 맞춤형 일자리를 알선해 주는 시스템으로 바꾼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청년 실업 문제를 줄이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임금 격차를 줄여 나가는 것이다. 그 격차가 너무 크기 때문에 한국의 젊은이들은 대학을 졸업하면 모두 대기업에 취직하려고 한다. 독일은 폭스바겐 직원들이 하청 업체 직원들보다 보수가 많겠지만 그 차이는 그리 크지 않다. 왜냐하면 독일은 기업별 임금 협상이 아니라 산별 임금 협상을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한국에서 바꿔야 할 점이다. 중소기업의 독립성을 높이고 대기업에 대한 의존도를 낮춰야 한다. 이를 위해 중소기업이 해외시장에 진출하고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정부가 더 많이 지원해야 한다.

용어 설명
어젠다 2010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전 총리가 2003년 발표한 국가 개혁안으로 노동시장 정책, 산업 정책, 조세 정책, 환경 정책, 이민 정책, 교육 정책, 행정 정책 등 광범위한 분야의 개혁 정책을 담고 있다. ▷해고 요건 완화 등 노동시장 유연성 제고 ▷실업수당과 건강연금보험 등 각종 사회복지 비용 축소 ▷연금 수령 연령 65세에서 67세로 연장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하르츠위원회 ‘어젠다 2010’을 위해 슈뢰더 전 총리의 적록 연립정부가 15명의 전문가로 구성한 노동시장 개혁위원회다. 2002년 2월 설립 당시 폭스바겐의 담당 이사였던 피터 하르츠(Peter Hartz)가 위원장을 맡아 ‘하르츠위원회’로 불리게 됐다. 하르츠위원회는 같은 해 8월 4단계 노동시장 개혁 방안을 내놓았다. ▷노동시장 서비스와 노동정책의 능률 및 실효성 제고 ▷실업자들의 노동시장 재유입 유도 ▷노동시장 탈규제로 고용 수요 제고 등에 초점을 맞췄다.
vivaj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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