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의 내달 방미를 앞두고 한국이 일본과의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를 상대로 외교전을 펼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입장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러셀 차관보는 27일(현지시간) 뉴욕 맨하튼에서 열린 미한국상공회의소 주최 세미나에서 “한미일 3국이 직면한 경제, 안보문제는 협력을 통해서만 풀 수 있다“며 “미국이 과거사 문제를 간과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한미일 3국이 동북아 지역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70년간 이룬 평화와 번영을 지속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러셀 차관보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지난달 방미에서 밝힌 과거사 관련 발언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아베 총리가 미 의회 연설을 통해 이전 총리들의 담화를 계승하면서 과거사를 치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러셀 차관보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아시아담당 선임보좌관 출신으로 미국의 동아시아 외교를 실무적으로 총괄하는 최고위직이다.
그는 한국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참여에 대해서도 “가입이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언급, 이전 미국 고위 관리들보다 전향적인 입장을 내놨다. 러셀 차관보는 “최근 미 상원서 대통령에게 무역협상촉진권한(TPA)을 부여하는 법안이 통과돼 TPP 비준 가능성이 높아졌다”며 “한국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서 보여준 적극적 행보를 감안하면 TPP 기준에도 잘 맞을 것”고 강조했다. TPA법안의 통과로 TPP의 연내 출범이 유력한 상황에서 러셀 차관보의 발언은 한국의 TPP 참여를 환영한다는 원론적 지지 입장에서 한 발 더 나아간 것이다.
러셀 차관보는 그러나 “한국 정부가 TPP출범 이전에 지적재산권 보호를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한국이 국제기준을 충족시키는 공정무역과 투명하고 예측가능한 규제를 위해 노력해야 하며, 이는 결국 한국에 이득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내달 워싱턴에서 열리는 한미 정상회담의 의제와 관련, 러셀 차관보는 “한미 관계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뉴 프론티어(New Frontier ) 협력을 위한 주제가 다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한미간 협력이 기존의 안보동맹과 경제 활성화를 넘어 사이버, 인터넷경제, 기후, 우주 등 뉴프론티어로 나아가야 한다고 설명이다.
그러면서 기존의 안보동맹은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협약과 ‘상시전투태세(fight tonight)’에 대한 새로운 협의 도출로 강화되고 있으며, 경제협력 역시 한미 관계를 넘어 지역번영과 안정을 추구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날 러셀 차관보의 발언중 눈에 띄는 부분은 한미 관계에서 기업들의 기여가 비약적으로 증가했다는 점이다. 그는 “로스엔젤레스의 대한항공 호텔과 롯데의 루이지애나 에너지 투자, 두산의 밥캣 투자 등 한국기업의 활발한 대미 투자는 미국의 일자를 창출하고 핵심적인 재화와 서비스를 공급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최근 삼성의 실리콘밸리 투자와 최고경영자(CEO)의 정기적인 미국 방문도 두 나라간 물리적 거리를 뛰어넘는 소통 노력과 함께 여전히 직접 교류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강조했다.
한국의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다양한 인재의 고용과 혁신의 탄력성을 부여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그는 “한국의 대기업은 자체 자본으로 독자적인 투자와 개발, 시장운영 능력을 보여주면서 미국에서 성공을 거둬 조언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전제했다. 그러면서 “다만 미국의 주요 일자리와 수출은 구글과 마이크로소프트 등 작은 아이디어를 갖고 차고와 대학 기숙사에서 시작한 기업들이 일구고 있고, IT 시대는 이러한 양상이 증가될 것”이라며 “한국 기업들도 유명 대학 졸업자만 선호하는 엘리트주의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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