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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 사회를 '한 방'에 쓰러뜨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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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의 역사읽기) 서양사에서 가장 유명한 전염병을 꼽으라면 아마도 투키디데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기술한 아테네 역병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병의 정체는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학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해 왔다. 특히 기원전 430~429년 아테네 군인의 4분의 1이 희생됐다고 추정되는 이 전염병은 전성기를 구가하던 아테네를 ‘한방에 보내는’ 결정타 역할을 했다. 이는 이후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 쇠락의 전조가 됐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다.

물론 일설에선 투키디데스가 지어낸 것이라는 주장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투키디데스의 역사서술 기법이 허풍과 과장을 배격한 객관적이고 ‘드라이’한 문체가 특징이어서, 재밌지만 허황된 점이 많은 헤로도토스에 비해 훨씬 믿을 만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대규모 전염병의 발생 자체를 부인할 수는 없을 듯하다. 당시 아테네 지도자 페리클레스가 아테네 외곽의 시민들을 성내로 불러들여 스파르타의 공격에 소극적으로 대항하는 전술을 구사했는데, 좁은 공간에서 인구밀도가 높아지고 보건·위생 상태가 나빠졌을 것이란 점도 전염병 발생 가능성을 키웠을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무엇보다 투키디데스가 묘사한 병의 모습은 지어낸 소설이라기엔 너무나 자세하고 구체적이다.

투키디데스의 전염병 발발과 확산과정 묘사를 직접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데, 마치 오늘날 신문 기사를 보는 것과 큰 차이가 없을 정도로 구체적, 객관적으로 묘사한 것이 매우 ‘현대적’이다.

“아테네인 사이에 전염병의 징후가 나타났다. 이 병은 이전에도 렘노스 섬 부근이나 그 밖의 여러 지역에서 발생했다고 하지만 이번만큼 큰 인명을 빼앗아간 기록은 없다. 처음에 의사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 치료해서 아무런 효과도 거둘 수 없었다. 도리어 그들 자신이 많은 환자와 접한 만큼 사망하는 숫자가 더 많아졌다. 여러 가지로 사람의 지혜가 미치는 한 많은 노력을 다했지만 소용이 없었다....<중략>...처음에 이 전염병은 이집트 남쪽에 있는 에티오피아에서 발생해 다시 이집트와 리비아로 퍼지고, 페르시아 왕국 각지에 들어왔다고 한다. 아테네에는 전염병이 갑자기 나타나 ...<중략>...사람들 사이에 펠로폰네소스인(스파르타인)이 저수지에 독을 넣었을지 모른다는 소문이 퍼졌다...<중략>...전염병은 (아테네의 외항인)피라이에우스에서 아테네 시로 퍼지고 점점 더 많은 인명을 빼앗으며 맹렬한 위력을 떨쳤다...<중략>...나는 실제 경과를 기술하겠다. 그것은 만일 이 전염병이 재발할 경우, 그 증상을 보고 정확하게 장례를 예측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다. 나 자신도 이 전염병을 체험하고, 또 많은 환자를 목격했으므로 이를 밝히고 싶다.”

이어 투키디데스가 자세하게 그리고 있는 병의 증상과 징후는 이후 이 병의 정체를 밝히려는 의학사 연구자들의 실마리이자 한계가 됐다. 자세한 묘사이긴 하나 현대 의학기준으론 모호한 표현도 있고, 질병 자체도 묘사에 꼭 들어맞는 질병이 없기 때문. 질병 자체도 진화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아마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수수께끼 일지도 모른다.

병의 증상에 대해 투키디데스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평소 건강했던 사람들도 갑자기 먼저 머리에 고열을 느끼고 눈에 염증이 생겨 충혈 됐다. 그리고 구강 내에서 혀와 목구멍에 곧 출혈증상이 나타나고 호흡이 고르지 못하고 이상한 악취가 났다. 이런 증상이 나타난 뒤에 재채기가 나오고 목이 쉰다. 그리고 이윽고 독한 기침과 함께 통증이 가슴으로 내려온다. 더 나아가 그것이 위까지 내려오면 구토가 일어나고, 전문가가 아는 한 그와 비슷한 부류의 온갖 담즙 토사에 시달렸다. 게다가 심한 기력저하가 수반됐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고통을 겪는 것은 구토로 인한 텅 빈 위의 격렬한 경련이었다. 이런 증상들이 토사상태 뒤에 점차 사라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언제까지고 계속되는 사람도 있었다. 피부에 손을 데 보면 특별히 열이 느껴지지는 않지만 붉은색을 띠고 있어 창백해 보이지는 않았다. 도리어 검푸르고 작은 농포나 종기가 생겼다. 하지만 체내는 이상하게 뜨겁게 느껴져 아무리 얇은 옷을 입고 있어도 참을 수 없었다. 사실 간호하는 사람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심한 갈증에 시달리다가 저수지에 몸을 던졌다. 아무리 물을 마셔도 상태는 똑같고, 게다가 잠을 잘 수 없고 쉴 수도 없는 고통스런 느낌만 더해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7일에서 9일 사이에 아직 여력은 남아 있었지만 고열 때문에 죽어갔다. 이 상태를 견뎌내면 증상이 장으로 옮겨가 장벽이 극도 짓물러 심한 이질현상을 일으켰다. 이 이질현상 때문에 쇠약해져 죽는 사람이 많았다. 간신히 죽음을 면한 사람의 사지에는 후유증이 남아 그것이 치부나 손발 등의 말단부에 미쳤다. 때문에 병이 회복되어도 이들 기능을 잃은 사람이 많았고 경우에 따라선 실명한 사람도 있다. 회복직후에는 일시적으로 모두 한결 같이 기억상실증에 걸려 친구도 자신도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다...종래 인육을 먹던 조수도 들판에 버린 시체가 아무리 많아도 다가가지 않고, 게다가 그것을 먹은 동물들은 죽었다는 것이다. 이 증거로는 이런 종류의 새가 자취를 감처 시체 주변에서도, 다른 장소에서도 보이지 않게 됐다.”

이 같은 투키디데스의 설명을 토대로 독일의 의사이자 역사가인 클라우스 베르크돌트는 “이 병을 현대의 의학자들은 보통 천연두에 의한 인구감소라고 보지만 고대 기록은 정확한 증상 묘사가 부족해 병명을 확증하긴 힘들다”고 전한다.

의학사가 재컬린 더핀에 따르면 투키디데스가 묘사한 질병의 후보군으로 그동안 천연두, 발진티푸스, 탄저병이 거론됐고 새로운 전염병이 발견될 때마다 아테네 역병과 연결되곤 했지만 아직 명확한 해결을 보진 못한 상태라고 한다.

역사학자 윌리엄 맥닐은 투키디데스의 기술을 토대로 “동부 지중해 연안의 여러 지역과 잦은 교류를 하면서 병이 바다를 건너왔고 이후 아테네 시민들의 혈액 속에 충분한 양의 항체가 생겨나 감염의 사슬이 끊어지게 됐다고 믿어진다”고 평하고 있다.

이어 투키디데스는 자세한 질병 묘사 뒤에 질병이 가져온 사회변화상을 충격적으로 전한다. 한마디로 역병이 도는 동안 사회구조가 붕괴되고 범죄가 만연했고, 사회 규범은 유명무실 해졌다는 것이다.

“감염을 두려워해 병자들에게 가까이 접근하려 하지 않아 환자가 나온 대부분의 집이 빈집처럼 돼 간호사도 없이 병자 홀로 남아 죽어갔다...그러나 이 전염병에서 회복된 사람들이 죽은 사람이나 환자에게 깊은 동정을 보인 것은 그 고통스런 질병을 잘 이해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젠 이 전염병에 다시 걸려 죽을 일이 없다는 안도감 때문이기도 했다. 당장 자신이 노골적으로 기뻐하며 앞으로 다른 병에 걸려도 전혀 죽는 일이 없으리라고 몽상하는 사람조차 있었다...사람들은 너무나 맹렬한 재난의 위력을 경험하게 되자 판단력을 잃고 신성이라든가 존엄에 아무런 가치도 인정하지 않게 됐다...대부분 부끄러움도 체면도 없는 방식으로 시체를 다뤘다...다른 측면에서 이 대 전염병은 아테네시 전체의 질서가 붕괴해가는 발단이 됐다. 이전에는 속박 받는 기분으로 은밀히 행했던 행동도 사람들은 당당히 해치우게 됐기 때문이다...건강도 부도 한결 같이 오래 지속되는 게 아니라는 생각에 쾌락을 즐기며 한순간의 열락을 중요시 했다. 사람들은 명예를 위해 참고 견디는 일 따위에는 흥미를 잃고...무엇이든 쾌락에 도움을 주면 그것은 선하고 유용한 것으로 해석했다. 사람의 법도, 신에 대한 두려움도 구속력을 잃었다.”

이 같은 공황과 사회질서의 붕괴 탓에 결국 역병이 지나간 뒤에도 아테네는 더 이상 과거의 영광스런 아테네일 수는 없었고 스파르타와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배하는 근원적인 원인 중 하나가 됐다. 대전염병은 아테네 사회가 그 충격에서 다시 회복하지 못하도록 했고 고대 지중해지역의 정치사를 근본적으로 바꿨다.

‘중동 사스’라고 불리는 메르스 확진환자가 계속 늘고 있고, 방역당국의 조치에선 허점이 계속 나타나고 있다. 사회 전반적으로 치사율이 높은 전염병에 대한 우려, 탁상행정 허점행정에 대한 비판도 높아지고 있다. 전염병을 둘러싼 사회의 논란을 바라보면서 문득 한 사회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었던 대전염병의 역사가 떠올라 몇 자 정리해 봤다./김동욱 증권부 기자 (끝)

***참고한 책***

투키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박광순 옮김, 범우사 1993

윌리엄 H.맥닐, 『전염병과 인류의 역사』, 허정 옮김, 한울 1995

재컬린 더핀, 『의학의 역사』, 신좌섭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6

도널드 케이건, 『투퀴디데스 역사를 다시 쓰다』, 박재욱 옮김, 휴머니스트 2013

Klaus Bergdolt, 『Der Schwarze Tod in Europa-Die Große Pest und das Ende des Mittelalters』, C.H.Beck 1994

오늘의 신문 - 2024.05.03(금)